"우리 농장 배추가 없으면 유럽 교포들이 김치 맛을 제대로 못 보제."

독일 중서부 아헨(Aachen)시 외곽에서 한국산 배추·무 등을 재배하는 '아헨자연농장'의 장광흥(60)씨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독일에서 한국 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으로는 규모도 제일 크고, 수확물의 씨알도 굵고 맛있다고 했다. 지난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그가 공급한 배추와 야채로 담근 김치를 먹었다. 물어물어 그를 찾아간 지난 13일 오후 늦게서야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오전 일찍 밭에서 배추 300포기를 뽑아 트럭에 싣고 뒤셀도르프의 '아시아카우프'라고 하는 가게에 물건을 넘기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장광흥씨의 양손에 들린 알 굵은 순무가 자라는 이 땅은 60~70년대 우리 젊은이들이 광부로 파견됐던 독일 아헨 지역이다. 1977년 마지막 파독 광부로 독일에 파견된 장광흥씨는 정년퇴직한 뒤 이곳에 우리 종자를 가져와 한국산 채소만 전문으로 생산하고 있다.

장씨는 1970년대 파독광부 출신으로 탄광 근처의 농지를 임대해 10년 넘게 농사를 짓고 있다. 그와 그의 아내 박봉순(54)씨가 꾸려온 농장은 독일 속 '작은 한국'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된장과 간장, 김치, 마늘 등 여러 가지 양념 채소 내음이 뒤섞인 한국인 특유의 '집 냄새'가 물씬 풍겼다. 바깥 텃밭에선 고추가 자라고 있었고, 그 옆 유리온실 안에는 호박과 각종 채소 모종이 가득했다. 차로 5분쯤 떨어진 거리에 있는 7000~8000평 크기의 배추밭과 무밭 5곳 등 4만 평에 가까운 농사였다. 키우는 작물도 다양해서 집 옆에 미나리꽝을 만들었고, 여수에서 돌산갓 종자를 가져다 직접 키우고 있었다. 이것 말고도 깻잎·부추·쑥갓·청경채·오이 등 1년에 종잣값만 1000만원이 넘게 들어간다고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독일에서 씨를 받아 키우면 맛이 나지 않아 일일이 종자를 한국에서 들여온다고 했다.

이 많은 농사를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루마니아 출신의 인부 마리아 세 명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농사를 지어본 것도 아니어서 지금까지도 농사는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돌산갓을 좀 빨리 심었더니 모두 꽃이 피어버려 못 쓰게 되아버렸어야…." 그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장씨는 "애초에 돈 벌 생각보다 은퇴 후에 부업처럼 시작했는데, 자꾸 물건을 갖다 달라고 하는 곳이 늘어나서 밭이 조금씩 넓어지다 보니 이렇게 돼 버렸다"고 했다. 수확량이 많아져 요즘은 3.5t 트럭으로 매일 한 차(車)씩 빼내도 밭에 물건이 남는다. 그러다 보니 동네 사랑방처럼 교민들이 찾아와 일손을 거들고 수확한 야채를 한 아름씩 안고 돌아가기도 한다. 이날도 인근 쾰른시에서 찾아온 교민들이 밭에서 고추를 따고 있었다.

장씨는 1977년 10월 마지막 파독 광부로 독일 땅을 밟았다. 그의 나이 27살 때였다. "원래는 딱 3년만 일해서 광주에 집 한 채 살 돈만 마련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80년 5월에 광주사태가 터져버린 것이제. 독일 정부가 우리들한테는 기간 연장을 해줘서 계속 일하게 되었지."

'80년 5월' 이후 독일 정부는 한국에서 온 광부들이 원할 경우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줬다. 그전의 파독 광부는 모두 3년 계약 만료와 함께 귀환시켰으나, 정책이 바뀐 것이다. 장씨는 결국 그렇게 해서 독일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80년 12월에 잠깐 귀국해 전남 화순 한 고향 사람인 아내와 선을 본 뒤 81년 1월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독일로 들어왔다. 장씨는 "결혼하고서도 3년만 더 일하고 나오려 했는데, 애를 낳고 그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그냥 주저앉게 됐다"며 "솔직히 그때만 해도 한국보다 여기서 교육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았다"고 했다. 현재 큰딸은 아헨 지역의 한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고, 큰아들은 패션을 전공해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때 지역 프로축구 리그에서도 뛰었던 막내아들은 아헨공대에서 공부하고 있다.

장씨가 광부로 일하던 시절의 모습.

유럽에서 한국 교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 치고 그가 배추 장사를 나가지 않는 곳은 없다. 인근의 쾰른이나 본뿐만 아니라 자동차로 3~4시간은 족히 걸리는 프랑크푸르트·베를린 등 독일 내 주요 도시와 국경 너머 암스테르담(네덜란드)과 브뤼셀(벨기에)까지 그는 직접 트럭을 몰고 가 한국식당이나 교회·성당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배추를 판다.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에도 중간 유통업자를 통해 그의 밭에서 자란 야채가 팔려간다. 유럽 방방곡곡을 다니다 보니 교통위반 딱지도 각국에서 날아온다. 이날도 그는 네덜란드에서 뗀 속도위반 벌금 20유로를 내고 큰 딸(29)에게 "운전 조심하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그의 농장에서 멀리 4~5㎞ 정도 떨어진 곳에는 말 그대로 '산더미'만한, 높이가 수백m는 족히 될 것 같은 거대한 검은 흙더미가 쌓여 지평선 위로 작은 동산을 만들고 있다. 지하에서 석탄을 캐낸 뒤 남은, 흙이나 뻘, 돌조각 같은 부산물이 수십년간 쌓여 산이 된 것이다. 지금은 폐광이 된 에밀마이리시 탄광이 있던 자리. 바로 그 땅 아래서 장씨는 청춘(靑春)을 보냈다.

"지하로 1200~1300m를 내려가서 또 사방으로 4~5㎞씩 파 들어갔지요. 젊어서는 땅속을 파서 살았고, 지금은 그 땅 위에서 흙을 파면서 살고 있네요. 아마 이 밭 아래 어디쯤인가를 수도 없이 지나 다녔을 거예요."

장씨와 아내는 젊은 날 떠나온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고향에서 가져온 꽃을 바라보며 달래고 있었다. 아내 박씨가 가꾼 정원에는 접시꽃, 봉숭아, 붓꽃, 코스모스가 자라고 있었다. 박씨는 "고향 생각이 사무칠 때가 가끔씩 있는데 그럴 때면 유독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이 그렇게 그립다"고 했다.

장씨는 "요즘 독일 주재원들을 보면 한국에서 부모님들 모시고 와 구경도 시켜드리고 하는데, 내가 젊었을 때는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면서 "그래도 여기까지 와 일가를 이루고 아이들 잘 키웠으니 제 인생도 '글뤽 아우프'라고 할 수 있겠죠"라며 웃었다.

'글뤽 아우프(Gl�jck auf!)'는 독일에서 광부들이 일을 마친 후 무사히 지상으로 올라올 것을 기원하며 땅속으로 들어가면서 주고받는 인사말이다. '행운을 갖고서 (땅)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