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토박이 이선철은 36세에 강원도 평창 폐교에 들어와 감자꽃 스튜디오를 세우고 한국 지역 문화기획자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한 사람의 문화기획자가 시골 마을 하나를 바꿔놓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마을의 사례가 전국으로 확대될 수 있을까. 강원도 평창 '감자꽃 스튜디오'에 가 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만하다.

3000여명이 모여 사는 평창 읍내에 현재 음악 밴드만 15개가 넘는다. 공무원 밴드·목사 밴드·팬션주인 밴드·고교생 밴드에 플루트 연주단·색소폰 동호회·드럼 동호회까지, 너무 많아서 정확한 수를 알기 어려울 정도다. 할머니들은 '평창아라리' 음반을 녹음해 내놓았고, 학생들은 감자꽃 스튜디오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며 음대 진학을 꿈꾼다. 이 모든 유쾌한 소란(騷亂)의 중심에 이선철(45) 감자꽃 스튜디오 대표가 있다.

김덕수패 사물놀이에서 문화기획자로 출발해 록밴드 자우림을 발굴하고 서울 대학로에서 중형 공연장까지 운영했던 그는 2002년 돌연 평창읍 이곡리 333번지에 있는 폐교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문화계에서는 "이선철이 죽을 병에 걸렸다", "엄청난 빚에 쫓겨 시골로 들어갔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그리고 9년이 지났다. 이선철은 누구보다 건강해 보였고, 돈을 번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빚은 없다고 했다.

피아니스트 노영심이 "인생 자체가 기획인 사람"이라고 평했다는 이 사내를 최근 평창 감자꽃 스튜디오와 서울 홍대 앞 카페에서 두 차례 만났다.

―이 산골에서 뭘 하고 지냅니까.

"주말엔 늘 여기에 있고 주초엔 숙명여대에서 강의를 합니다. 주문진 수산시장 옥상에 있는 '꽁치극장', 춘천 중앙시장의 '낭만시장'도 한 번씩 들러야 하고…. 서울·춘천·주문진·평창만 뺑뺑 돌아도 일주일이 바빠요. 게다가 최근 울릉도에 700만원 들여서 농가를 샀습니다. 이곳을 무인 레지던스(residence) 또는 무인 스튜디오로 개조할 계획이에요. 음악이나 사진, 미술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죠."

―강원도가 고향인가요.

"아닙니다. 제 부모님은 모두 평안도 분이고, 저는 서울 토박이입니다. 그렇지만 어찌어찌 하다 보니 버려진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재활용하는 것이 저의 일이 됐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유학(런던 시티대)할 때 전공 역시 문화공간 조성에 관한 겁니다. 이제 '이곡리 333'이란 음악 레이블을 만들 생각입니다. 새 주소로 바뀌어도 마을 이름을 남기고 싶으니까요."

감자꽃 스튜디오는 1999년 폐교된 평창초 노산분교를 개조한 문화공간이다. 평창읍내에서 평창강 지류를 따라 서쪽으로 5㎞쯤 가다 보면 굽잇길을 끼고 갑자기 나타나는, 초현대식처럼 보이는 건물이다. 건축가 이종호가 폐교 외벽에 철골을 대고 유리처럼 반짝이는 벽을 하나 더 세워 현대적 건축물로 보인다. 옛 학교 마룻바닥을 그대로 살리고 교실을 터 개조한 이곳이 평창의 자랑인 문화센터다.

2층짜리 건물 곳곳에 이선철의 아이디어가 빼곡했다. 1층엔 노산분교 박물관, 감자꽃 책다방, 이종욱 키친, 교무실이 있고 2층엔 '이곡리 극장'이란 소극장과 숙소가 있다. 노산분교 박물관엔 모든 마을 주민의 모교인 노산분교의 옛날 사진과 물건들을 전시했고, 감자꽃 책다방은 말 그대로 북 카페다. '이종욱 키친'은 주방기구를 기부한 이종욱 백조표 싱크 사장의 이름을 딴 식당이고, '이곡리 극장'엔 그랜드 피아노와 드럼 세트, 앰프, 음향기기가 구비돼 있었다.

―왜 서울을 떠났습니까.

"1999년에 가수 이승환 전국 투어를 제가 했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던 때였고 많이 먹고 마시던 시절이었죠. 그해 6월 23일 한밤중에 문득 깼습니다. 팔다리에 힘이 없고 말도 어눌하게 나왔어요. 응급실에 달려갔더니 뇌경색이라고 했습니다. 콜레스테롤 수치도 굉장히 높고 혈관도 좁아졌답니다. 다행히 수술을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의사가 '뇌경색이 매우 이른 나이에 온 경우'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서른셋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계속 일을 했지요. 그런데 주위에서 '그러다가 정말 쓰러진다'는 충고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서울 일을 모두 접고 2002년 5월에 이곳으로 왔습니다."

강원도 강릉 주문진 수산시장 옥상에 2009년 6월 만들어진‘꽁치극장’은 이선철의 감자꽃 스튜디오가 평창을 떠나 만든 첫 번째 지역 문화공간이다. 꽁치극장 에서 타악그룹‘노리단’이 공연하는 모습.

―그런데 왜 평창이고 폐교입니까.

"예전 김덕수패 기획실장을 할 때 충남 부여 폐교를 사물놀이 학교로 만든 적이 있었고, 97년엔 양평 폐교를 전통악기 공방으로 개조했었어요. 그래서 강원도 폐교를 찾다가 여길 알게 됐습니다. 그때 제 수중에 딱 850만원이 있었습니다. 폐교 1년 임대료 500만원 내고, 교무실 자리에 온돌 까는 데 100만원, 싱크대 설치하는 데 100만원, 남은 돈 150만원으로 혼자 여기서 생활을 시작한 거죠."

―이 큰 학교에서 혼자 살았다는 게 좀 이상합니다만.

"제가 워낙 산을 좋아해서 매일 산에 올라가 서너 시간씩 걷고, 못 읽은 책도 읽고, 간혹 서울에서 놀러 온 사람들 만나면서 지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전략이나 철학을 갖고 시골 폐교에 왔느냐'고 물으면 좀 난감한데, 솔직히 저는 살을 빼러 왔습니다. 여기 사람들처럼 밥 먹고 매일 산을 걷고 하니까 들어올 때 106㎏이었던 체중이 1년 만에 78㎏으로 줄었습니다. 자연히 건강도 좋아졌지요."

―그런데 어떻게 다시 본래의 업으로 돌아갔습니까.

"그렇게 한 1년간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김진선 당시 강원도지사님이 제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강원도는 보통 사람 한 명이 들어와도 환영할 판인데 문화기획 하던 사람이 와 있다니' 하면서요. 그분이 그때 '혼자 이렇게 지내지 말고 이곳을 주민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뒤 군에서 이 학교를 매입하고 도에서 리모델링 자금을 대줬죠. 2004년 1년간 공사를 해서 2005년에 지금의 스튜디오가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일을 벌이기 시작했군요.

"문화관광부 예산을 따내서 평창 초·중학교 학생 전원에게 국악을 가르쳤습니다. 평창고교에는 록 밴드와 브라스 밴드, 풍물 동아리를 만들어 지도했지요. 그게 2004년부터 시작한 3년짜리 프로젝트였는데,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평창고 밴드는 '대일밴드'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졸업생이 재학생을 가르치는 식으로 100% 지역화됐습니다."

―'대일밴드'요?

"'음악으로 크게 하나가 되자'는 뜻이라나? 무슨 조폭도 아니고. 하하하. 공무원 밴드 이름은 '송어스'예요. 여기 송어가 유명하거든요. 하하하. 평창고 교장선생님이 맨날 골치 썩이는 아이들에게 뭐라도 가르칠 사람이 필요했고, 처음엔 소위 '좀 노는' 아이들이 왔어요. 홍대 프린지 페스티벌 음악감독이 매주 와서 아이들을 가르쳤죠. 지금은 공부 잘하는 애들이 '대일밴드'에 들어오려고 몰립니다. 브라스 밴드는 조회에서 애국가 반주할 때마다 조마조마하던 수준이었습니다. 역시 음대 출신 아는 선배가 헌신적으로 가르쳐서 좋아졌습니다."

―공무원이나 주부들 밴드는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그렇게 아이들이 신나게 음악을 배우니까 학부모들이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시골 문화센터에 보통 사군자 치기, 민요 배우기 같은 게 전부인데, 우리는 기타반, 플루트반, 드럼반을 만들었어요. 문화원장님이 '시골 기타반에 사람이 얼마나 올까' 하고 걱정했지만, 너무 많이 와서 A·B반으로 나눌 정도였죠. 그런 식으로 마을 전체의 문화 의식이 점차 높아지니까 이젠 어떤 일을 해도 이해가 빠르고 참여도도 높아요."

감자꽃 스튜디오의 자랑인 이곡리 극장엔 프로 연주자용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와 앰프, 드럼 세트, 음향기기가 완비돼 있다. 이곳에서 평창읍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 동호회 모임을 한다. 이선철은“모든 인디밴드들에게도 무료로 스튜디오를 빌려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마을축제가 꽤 성공적이었다면서요.

"이틀간 이곳에서 축제를 했는데 1000명쯤 다녀갔습니다. 보통 시골 마을축제라고 하면 특산물 판촉행사에 트로트 가수 와서 노래하면 술 한 잔 마시고 끝납니다. 그것보다는 주민들이 직접 출연하는 축제가 좋지 않겠나 해서 그렇게 기획했지요. 할머니 40명이 매일 농요(農謠)처럼 부르던 평창아라리 가사를 600편쯤 채록해서 정식 음반으로 만들었더니 할머니들도 나오시고, 대일밴드, 목사님들이 만든 기타 밴드도 다 무대에 섰습니다. 초대 손님은 서울에서 온 김창완 밴드가 유일했어요. 김창완씨가 저희 감자꽃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유능한 기획자가 시골 축제를 여는 건 '재능 기부'가 아니라 재능을 썩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하는 일의 3분의 1은 이곳과 주문진, 춘천에서 문화기획을 하는 것입니다. 또 3분의 1은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을 비롯한 각종 기관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죠. 문화관광과 예술경영 분야의 강사자원이 매우 부족하거든요. 나머지 3분의 1은 문화관광부와 농림부의 정책이나 사업에 수시로 불려가서 자문을 해주고 있습니다. 시골에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오히려 할 일이 많아요. 서울에는 저 같은 기획자만 수천 명입니다. 평창만 해도 처음에는 뭐 하나 하려 해도 모든 인력이 서울에서 와야 했어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혜 대상이었던 학생들이 이제 지역 문화기획자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시골에서 취직이라고 하면 농협이나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것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감자꽃에서 사무를 보거나 기획을 하는 것이 또 다른 일자리가 됐습니다. 주문진 프로젝트도 강릉대 출신 청년을 서울의 대학원에 진학시켜 가르친 뒤 고향으로 내려보냈고, 춘천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친구도 춘천 출신으로 서울에 있던 사람이에요. 그렇게 자신의 출신지역에서 문화기획을 하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성취가 가능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현재 평창읍 전체 인구는 3800여 가구 9070명이다. 이 숫자는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감자꽃 스튜디오가 사망 인구를 줄일 수는 없지만, 젊은 인구의 유출을 조금이라도 막는 역할은 하는 듯했다. 박현창(57) 평창읍장은 "이선철 대표는 우리 평창의 문화적 리더이자 보배 같은 분"이라며 "연고지도 아닌 곳에 들어와 마을 발전에 기여하고 있어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강원도지사에 출마한다던데요.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농담이죠! 하하하. 솔직히 '강원' 자가 쓰인 자동차 번호판을 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 오고 나니까 번호판 체계가 바뀌더라고요. 제가 왔을 때만 해도 여기(이곡리) 주민이 30가구 86명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68명으로 줄었습니다. 전입인구는 없고 노인들이 하나둘씩 돌아가시는 거죠. 결국 한 20년 뒤면 이 마을이 빈다는 뜻인데, 그래서 농담으로 '가만히 있어도 이장은 하겠다'고 말하곤 하죠. 어차피 저는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겠다고 결심했으니 이 마을 빈집을 각종 스튜디오로 만들어서 아트 밸리(art valley)로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빈집을 개조해서 김창완 스튜디오, 사진작가 스튜디오, 목공 스튜디오 식으로 바꾸는 거죠."

―얼추 10년을 살았으니 실제로 이장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해병대 출신 58년생 이장님이 시퍼렇게 살아계십니다. 하하하. 제가 제일 젊고 이장님이 그 위예요. 이장하겠다는 건 장난처럼 하는 말이고,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거죠."

평창 주민들로 이뤄진‘평창아라리보존회’회원들이 마을 축제에서 공연하는 모습.

이선철은 국내 유수 제책사(製冊社)인 경일제책 이약실(2009년 작고) 사장의 맏아들이다. 평양 출신의 이 사장은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가업을 일으켰다. 그는 40여년 일궈 온 서울 만리동 공장을 파주 출판단지 신사옥으로 옮겨 처음 출근하던 날 사고로 숨졌다. 두 형제의 맏이인 이선철은 자신이 평창에 자리잡게 된 것은 오로지 선친의 가정교육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술·담배·골프 일절 하지 않고 오직 음악과 책, 산을 사랑한 분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주말마다 아버지와 산에 다녔고, 집에서는 늘 클래식 음악을 들었습니다.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게 해주고, 늘 산에 다녔던 게 제 인생의 자양분이 됐습니다. 지금도 제게 최고의 즐거움을 주는 것은 혼자 산길을 걷는, 극도로 단조로운 시간입니다. 제 인생에서는 문화와 자연이란 두 가지 코드가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저는 도시와 인연을 끊고 개량한복 입고 시골에서 사는 건 못해요. 그렇지만 자연이 제게 주는 영감과 동기부여는 매우 큽니다."

―대학에서 사회학(연세대)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문화기획자가 됐습니까.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플루트를 배웠습니다. 음대 진학을 생각할 정도로 꽤 열심히 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 2때 음악 잡지에서 '뮤직 매니지먼트의 모든 것'이란 기사를 봤습니다. 그때만 해도 음악 매니지먼트라는 개념이 없다시피 할 때죠. 그 기사를 읽고 '음악을 직접 하는 것보다 음악기획을 하는 게 낫겠다' 생각해서 일찍 제 진로를 결정했죠. 그래서 대학에 진학해서도 음대 친구들과 사귀고 오케스트라 일을 돕고 하면서 닥치는 대로 현장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88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자원봉사자가 되면서 김덕수 선생을 만난 겁니다."

―클래식 애호가가 국악으로 전향했군요.

"클래식뿐 아니라 팝 음악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국악은 고리타분하고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사물놀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다이내믹한 월드뮤직이 있나! 기획자로 할 수 있는 일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그때부터 10년을 김덕수패 기획실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대중음악 기획자로 변신했습니까.

"김병찬(플럭서스뮤직 대표), 우현정(뮤직웰 대표), 이훈석(젬컬처스 대표)씨와 함께 '난장'이란 레이블을 차렸죠. 그때 홍대 앞 클럽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미운오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자우림을 발견했어요. 그때 마침 '꽃을 든 남자'란 영화에 쓸 음악이 필요해서 만들어오라고 했더니 자우림이 가져온 노래가 첫 번째 히트곡 '헤이 헤이 헤이'였죠. 정작 영화는 망했는데 노래가 히트하면서 자우림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음악 기획자로서 최고의 전성기는 언제였습니까.

"전성기라기보다 가장 역동적으로 일했던 때는 역시 밴드 '긱스'와 함께 일할 때였습니다. 정원영·한상원·이적·강호정·정재일·이상민, 쟁쟁한 멤버들과 함께 매일매일 즐겁게 일했습니다. 그 밴드 멤버들이 한국 대중음악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요."

그는 '난장'을 거쳐 '폴리미디어'라는 기획사를 차리고 긱스를 비롯, 롤러코스터, 어어부프로젝트, 한충완, 가야금앙상블 사계 등의 음반을 내놓았다. 노영심이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회사도 이곳이었다. 모두 한국 대중음악에서 손꼽히는 뮤지션들이다.

―그리고 IMF 때 회사가 어려워졌습니까.

"IMF 이전이나 이후나 늘 어렵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제 건강이 갑자기 나빠진 거죠. 빚도 있긴 했지만 모두 갚은 뒤에 평창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어려우면 부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요.

"월급날 몇 백만원 정도 아버지께 빌려쓰고 갚은 적은 있지만 아버지 돈을 투자 조로 끌어다 쓴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재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저는 동생에게 유산상속 포기각서를 써주었습니다. 가업을 이어받은 동생에게 늘 부채의식이 있었거든요. 큰아들이 천방지축 밖으로만 나돌았으니까요. 어느 날 법무사한테서 전화가 왔더군요. '상속 포기를 했던데 혹시 구금이나 협박이 있었느냐'고요. 형제간 유산 싸움은 숱하게 봤지만 장자가 유산을 넘겨준 건 처음 봤답니다."

―정말 흔치 않은 경우군요.

"저는 평창에 들어오면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다. 둘째, 할부구입을 하지 않는다. 셋째, 대출을 받지 않는다. 어차피 재산이 없으니까 대출도 안 되고 카드를 안 쓰니까 할부도 안 됩니다. 저는 남들이 알면 깜짝 놀랄 만큼 가진 게 없습니다. 문화계 경력이 꽤 되니까 무슨 기관장이나 전임교수 자리를 할 법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런데 관심이 없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제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다가 물처럼 흘러가고 싶습니다."

이선철은 아마도 평창 동계올림픽 때문에 또 바빠질 것이다. 올림픽이 열리는 2018년이면 그가 평창에 온 지 16년이 된다. 주민등록상 16년간 평창 주민이면서 문화기획자인 그를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가만둘 리 없다. 그는 "문화이벤트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하면 얼마든지 하겠다"면서도 "평창 올림픽 유치에 내가 기여한 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정치인·관료·기업가를 막론하고 평창에 한 발이라도 담가봤다면 죄다 "내가 올림픽 유치의 주역"이라고 나서는 요즘, 그의 말은 겸양으로 들렸다.

―감자꽃의 성공은 청년실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이른바 '좋은 스펙'을 가진 청년들에게 기획서 한 장 써보라고 하면 쩔쩔매는 것을 봅니다. 현장에서 부딪칠 생각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꿈의 직장'에 취직하려다 보니 그렇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정규직이면 어떻고 비정규직이면 어때요? 알바면 어떻고 자봉(자원봉사자)이면 또 어떻습니까. 지금 내게 주어진 일에 헌신하고 몰입해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적(敵)은 가족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일단 부딪치면서 대안을 찾아나가야 하는데 가족은 내가 삼성이나 SK에 취직하기를 원합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시골 학교 학부모로서 자모회 파티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습에 감동받은 그 지역 국회의원 부인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37세에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시작해 미국 국무장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사람을 감동시키겠다'는 사람은 꿈을 이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

헤어질 때 이선철은 유기농으로 그을린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배웅했다. 그는 "정말 꼭 가봐야 할 곳"이라며 식당 한 곳을 소개하며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있다"고 했다. 정작 가보니 3.5㎞나 가야 하는 데다가 산꼭대기에 있는 펜션이었다. 도시 사람이 시골 사람에게 길 물어보면 낭패하기 쉽다더니, 영락없는 시골 사람이었다.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감자꽃 스튜디오를 다시 지나쳤다. 간판 '감자꽃'의 'ㅊ' 자에만 노란 불이 들어와 캄캄한 마을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별 하나가 내려와 앉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