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방송인으로 더 유명해진 서유석은 명동 오비스캐빈과 청개구리 등 청년 문화공간에서 활동하며 사회의식이 강한 싱어송라이터로 사랑을 받았다.

이제는 교통 전문 방송인으로도 잘 알려진 서유석 형 역시 포크 1세대다. 그가 데뷔하게 된 사연도 재미나다.

1969년 TBC 라디오에 '브라보 선데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씨와 구봉서씨가 사회를 봤다. 하루는 서울 명륜동에 살던 구봉서씨가 퇴근길에 성균관대 앞에 있던 카사노바라는 카페에 들렀다. 키가 무척 큰 한 청년이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다 생각했다. 물어보니 핸드볼 팀 골키퍼 출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봉서씨는 '브라보 선데이' PD 조용호씨와 함께 카사노바를 찾았다. 조 PD 역시 그의 노래를 마음에 들어 했다. 일주일도 안 돼 이 운동선수는 '브라보 선데이'에 출연했다. 그가 바로 서유석 형이었다.

당시 트윈 폴리오는 '브라보 선데이'에 고정 출연 중이었다. 운 좋게도 그의 데뷔 무대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서유석 형은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g in the wind)'와 '더 라스트 싱 온 마이 마인드(the last thing on my mind)'를 불렀다. 바이브레이션이 독특했다. 입을 다 벌리지 않고 다문 듯 노래를 불렀다.

그때 이후로 그는 '통기타 문화의 메카' 서울 명동에 진출했다. '오비스캐빈'에서 주로 불렀다. 기타도 쳤지만 하모니카도 불었다. 그리고 곧 앨범도 내기 시작했다. 처음 발표한 곡이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삽입곡 '사랑의 노래'를 번안해 부른 곡이었다. 후에 직접 노래를 쓰면서 발표한 그의 곡들엔 시적 감수성이 묻어났다.

그는 서울 명동 YWCA 노래모임 '청개구리'에서 활동하며 당시 정권을 풍자적이거나 냉소적인 노랫말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1971년 발표한 '세상은 요지경'의 경우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담배'와 '강' 등이 실린 '서유석 걸작집'의 경우 앨범 전체가 금지를 당했다. 그는 노래가 강렬하진 않은데, 노래에 담긴 메시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1973년 일이 터졌다. TBC 라디오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진행할 때였다. 서유석 형은 베트남 전쟁을 목격한 UPI 통신기자의 종군기 '어글리 아메리칸' 일부를 방송에서 읽었다. '18~19세의 어린 미군 병사들이 판초를 뒤집어쓰고 총소리만 나면 아무 데나 총을 쏘는 바람에 자기 소대장도 죽였다'는 등 베트남전에 비판적인 내용이었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을 촉구하기 위해 방한했을 때였다. PD가 20분짜리 노래를 틀어놓은 사이에 그는 그 길로 야반도주했다.

3년간 방송계를 떠났다. 처음엔 충무로에서 양복점을 열었다. 무허가였다. 재단사를 고용해 전화로만 영업했다. 그러다 세무서 추적이 시작됐다. 더이상 서울에 머무를 수 없었다. 대전으로 내려갔다. 생맥줏집을 개업, 거기서 노래를 불렀다. 당시 대전에서 통기타 붐이 일었는데, 모두 서유석 형 덕분이었다. '가는 세월'도 이때 탄생했다.

1976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가는 세월'을 취입했다. 반응이 좋았다. 여름에 발표한 음반은 겨울에 100만장 판매를 돌파했다. 이때 MBC 라디오의 고정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정오의 희망곡'으로 시작해 '서유석입니다'를 거쳐 교통방송 '푸른 신호등'을 맡게 됐다. 17년 넘게 DJ를 맡아 교통 전문 방송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