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빚은 매우 매우 높은 수준이며, 지금으로선 안전판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안데르스 보르그 스웨덴 재무장관)

지난 주말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가운데 시한폭탄인 그리스가 재정 감축안을 이행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그리스가 결국은 ‘질서 있는 디폴트’ 수순을 밟게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질서 있는 디폴트란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더 늘리는 등 그리스 부도 처리 비용을 미리 마련해놓고, 채권자 간 우선순위를 정하는 등 각국이 디폴트 이후 과정을 미리 협의하는 것을 말한다.

3~4일(현지시각) 룩셈부르크에서 비공개로 열린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무장관 회의에서는 예상과 달리 EFSF에 대한 지급 보증 추가 확대나 차입을 통한 EFSF 확대 방안 등에 대해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했다. 대신 각국 재무장관들은 유로존 은행들이 자본을 확충하는 데 공조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스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할 경우 그리스에 대한 익스포저(위험 여신)가 큰 국가들이나 유럽 은행들이 연쇄적으로 위험해지는 만큼, 일단은 주변 리스크(위험)부터 줄여놓자는 것이다.

은행들의 자본확충 등 사전 정지작업이 원만히 진행될 경우 그리스가 설사 디폴트되더라도 국제 금융시장의 충격은 최소한에 그칠 수 있을 전망이다.

◆ 유로존 안전망 강화 논의는 진전

4일(현지시각) 1~2% 수준 하락하던 뉴욕 증시는 장 막판 뒷심을 발휘하며 1.5% 가까이 반등했다. 유럽 은행들이 자본 확충에 나선다는 소식이 호재가 됐다.

이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서 현재 재정 위기 상황에서 유럽 은행들이 버틸 수 있다는 신뢰감을 금융시장에 주지 못하는 만큼 은행권의 자본 확충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보도했다.

올리 렌 유럽연합(EU) 경제·통화 담당 집행위원은 “유로존 은행들이 자본을 확충해야 추가적인 안전망이 만들어지고, 불확실성도 줄일 수 있다”며 “이런 방안은 EU가 유럽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내놓는 전략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FSF 지급 보증 한도를 4400억달러로 증액하는 안도 현재 회원국 승인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EFSF 출자 규모가 가장 컸던 독일에서도 증액안이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됐다. 김세용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위원은 “EFSF 증액을 통해 재정이 취약한 국가들의 국채 원금을 부분적으로 지급 보증해 조달 금리를 안정화하는 방안이 (안전판으로) 가장 먼저 추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유럽중앙은행(ECB)은 양적 완화를 지속하면서 국채 매입, 대출 기한 연장, 은행 커버드 본드(주택담보대출을 담보로 발행하는 채권) 매입 같은 응급조치를 지속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그리스 "11월 중순까진 버틸 수 있다"

한편 유로존 재무장관들은 그리스에 지급하기로 했던 1차 구제금융 가운데 6차분(80억유로) 지급을 오는 13일에서 이달 말로 다시 미루기로 했다. 장클로드 융커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회의) 의장에 따르면,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EU·ECB 등 이른바 '트로이카'는 13일 이후에나 그리스 실사 보고서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트로이카는 그리스가 재정 감축 의지를 얼마나 보여주고 있는지, 이를 실제로 이행할 수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점검하기 위해 실사를 벌이고 있다. 유로존 재무장관들은 이 결과를 토대로 6차분 지급을 결정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4일 그리스 증시는 1993년 이후 최저치로 곤두박질 쳤다. 아테네 ASE 지수는 전날보다 6.28% 고꾸라진 730.33에 거래를 마감했다. 이날 하락폭은 지난해 4월 이후 최대치이며, 종가로 보면 1993년 6월 이후 최저 수준이다. 특히 금융주들이 10% 안팎으로 떨어지며 하락세를 주도했다.

그리스가 추가 지원금을 받게 될 가능성은 높지만, 당초 알려진 대로 지급 시기가 지연될 경우 그리스는 당장 만기가 돌아오는 국채를 상환하지 못해 디폴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10월 중순 디폴트설이 유력했다. 에반겔로스 베니젤로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그러나 “다음달 중순까지는 국채 상환을 비롯해 공무원 월급 지금, 연금 지급 등을 자력으로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제 사회는 당초 예상보다 한 달가량 시간을 번 만큼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지급을 보다 신중히 결정할 수 있게 됐다. 민간 채권자들이 얼마나 추가 부담을 해야 할 지도 관건이다. 융커 의장은 “지난 7월 21일 정상회의 결정 이후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며 “기술적으로 수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언급해 민간 채권단의 국채 상각비율 확대가 고려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앞서 지난 7월 민간 채권자들은 그리스 부채 가운데 21%를 탕감해주기로 잠정 합의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