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67)씨가 30년간 운영해온 '고바우문구점'은 서울 중구 충무초등학교 앞에 있는 유일한 문구점이다. 이 학교 앞에는 1990년대만 해도 문구점 5곳이 있었는데, 하나씩 문을 닫더니 이제 한 곳만 남았다.

경쟁업체가 한 곳도 없는데도 김씨의 가게에는 손님이 거의 없다. 김씨는 "예전엔 아침에 조금만 문을 늦게 열어도 (학생들이) 난리가 났는데, 이젠 아예 문을 안 열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며 "특히 올해부터는 월세 정도 나올 뿐, 최저 인건비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곧 문구점을 닫을 생각을 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앞에 있는 문방구. 매출이 줄면서 최근 문을 닫아 지금은 창고 용도로 쓰이고 있다.

학교 앞 문구점들이 사라지고 있다. 1999년 2만6986개에 달했던 전국 문구점은 매년 꾸준히 줄어 2009년 1만7893개로 떨어졌다. 10년 만에 9000여개(34%)가 문을 닫은 것이다.

이처럼 문구점들이 어렵게 된 것은 컴퓨터 등의 발달로 공책과 연필 같은 전통적인 문구류가 잘 팔리지 않는 데다, 최근 들어 시·도교육청들의 '준비물 없는 학교' 정책으로 준비물을 학교에서 일괄구매해 학생들에게 지급해주면서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최근 각 시·도교육청은 학습 준비물 예산 지원을 크게 확대했다. 서울시와 서울교육청은 올해 190억원을 편성해 초등학생 1인당 3만원, 중학생 1인당 1만원씩 학습준비물비를 지원한다. 경기·광주·강원·제주 등도 학생 1인당 2만5000~5만원 정도를 준비물비로 지원한다. 학교가 이 예산으로 준비물을 대량 구입해 나눠주기 때문에 학생들은 문구점에서 살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다. 각 학교는 '학습준비물지원센터'에서 준비물을 관리한다.

이런 정책을 학부모들은 반기고 있지만 영세한 문구점들엔 치명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울 지역 학교들은 문구업체에서 직접 준비물을 사지 않고, 교직원공제의 자회사인 교원나라가 운영하는 전자계약지원시스템 '학교장터'를 통해 구입한다. 서울교육청이 학교들이 구매할 물품과 수량을 파악해 일정 금액 이상이 되면 학교장터에 공고를 하고, 경쟁 입찰을 통해 구입하는 형식이다. 이때 단가를 낮출 수 있는 대형업체들이 주로 입찰을 받게 된다고 문구업체 관계자는 전했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재정과 담당자는 "학교장터를 통하면 과거 학교장이 문구업체와 수의계약을 하면서 생기는 불법 리베이트 등을 차단하고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구업체들은 "지자체는 지역 소상공인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오히려 말살시키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200여개의 문구소·도매업체가 회원인 한국문구도매업협동조합은 지난 7월 서울 등 주요 시·도교육청에 "'준비물 없는 학교 정책'과 '학교장터'가 문구 업체를 도산시키고 있다"는 진정서를 보냈다. 이에 앞서 6월에는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앞에서 화훼업체·제과업체 등과 함께 '소상공인 생존권 수호를 위한 집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문구도매업협동조합 박복실 차장은 "대기업이 동네 수퍼마켓과 빵집을 문 닫게 했는데, 소규모 문구점들은 정부 시스템 때문에 문을 닫고 있다"며 "학교에서 일괄구매해 나눠주지 말고 학생들에게 준비물을 살 수 있는 쿠폰을 줘서 문구점에 올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