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 20일 새벽 서울 홍은동 스위스그랜드호텔 스위트룸 57호에서 인기그룹 '듀스'의 멤버 김성재(사망 당시 23세)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오른쪽 팔뚝엔 주삿바늘 자국 28개가 있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식 결과 동물용 수면제 졸라제팜과 황산마그네슘 등이 몸에서 검출됐다.
사건 발생 19일 만에 경찰은 김성재의 애인 K(당시 25세·치과의사)씨가 김성재와 늦게까지 호텔에 머물렀고 사건 발생 전 김성재의 몸에서 검출된 성분의 동물용 수면제를 구입한 사실 등을 밝혀내고 K씨를 구속했다.
K씨는 1심에서 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판결이 뒤집어졌고 대법원 역시 K씨에 대한 무죄를 확정했다. 김성재 사건은 타살 의혹만 제기된 채 미제(未濟)로 묻혔고, 15년이 흘렀다.
그런데 올해 1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드라마 '싸인'은 김성재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을 방송했다. 네티즌들은 '김성재 사건의 재조명'이라면서 자신의 의견을 인터넷 사이트에 쏟아냈다.
당시 김성재 사망 사건을 취재했던 방송국 PD는 자신의 블로그에 "여자 친구를 언론에 최초로 공개한 것이 나다. 특종이란 걸 하고 오랜 세월 고통에 시달렸다. 잘못된 취재 때문에 금전적 피해를 방송사에 입혔다. 죽은 성재에게도 죄스러웠고 무죄가 된 그녀에게도 죄스러웠다"면서도 "드라마에서라도 진실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대리만족하고 싶다"고 적었다.
일부 네티즌은 PD의 글과 당시 신문 보도를 토대로 "동물용 수면제를 구입한 동물병원에 약품 구입 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사망 전에 김성재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는 K씨가 진범이 아니겠냐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K씨는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지난 2월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한 네티즌 11명과 블로그에 글을 올린 PD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서울중앙지검의 지휘를 받아 강남경찰서가 수사를 담당했다. K씨측에 대한 고소인 조사에 이어 PD와 네티즌에 대한 소환 조사가 이어졌다.
서울중앙지검은 수사 6개월 만인 지난달 말 결론을 내렸다. 네티즌 4명에 대해선 벌금 100만~300만원을 물리기로 했다. K씨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가 인정되지만 애인을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한 드라마를 보고 글을 올린 점 등을 감안해 정식으로 재판에 넘기지는 않았다. 검찰은 소환 요구에 불응하거나 연락이 되지 않는 7명에 대해선 수배 조치를 내렸다. 검찰은 그러나 PD에 대해선 "그의 블로그 글은 일종의 취재 소감으로 K씨를 비방할 목적으로 적은 게 아니다"라는 이유로 무혐의 처리했다.
김성재 사건의 공소시효가 작년 11월 20일 만료됐는데도, 뒤늦게 사건의 본질과 관계없이 11명이 처벌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김성재는 1992년 동료 이현도와 함께 그룹 '듀스'를 창설, 연예계에 데뷔했다. '굴레를 벗어나' '상처' 등의 히트곡을 내며 단숨에 톱가수 반열에 올랐고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솔로가수로 독립해 재기를 모색해왔던 김성재는 사건 한달 전 미국에서 돌아와 새 앨범을 준비하다 변을 당했다.
이현도는 살인 혐의로 기소된 K씨가 1심 판결과 달리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1996년 11월 기자회견을 갖고 가수로서의 공식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무죄 판결문에 김성재의 마약 복용 가능성이 담겨 있는 것이 가수 활동 중단의 이유"라며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욕보이는 일이며 이런 상황에서 모든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했다.
한편 김성재의 모친 육영애씨는 드라마 '싸인'이 방영되고 나서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아들의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면 나와 좀 더 의논을 거쳐 구체적으로 접근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기회가 되고 또 좋은 작가가 있다면 당시 일을 설명하고 진실과 양심을 추구하는 새로운 작품이 탄생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육씨는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해서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범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는 살아있는 내내 양심에 찔려 괴로워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