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송창식과 함께 '빅 3 공연'을 다닐 때 종종 김세환은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환갑이 넘는 지금까지도 절 챙겨주는 영원한 형님입니다."

맞다. 김세환은 내게 영원한 동생이다. 그의 공연과 방송 데뷔 무대에 같이 섰다. 그의 데뷔 앨범도 같이 만들었다. 환갑이 넘어도 이 관계는 변함없다.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1970년 봄에 그를 처음 만났다. 일종의 야외 학습장인 경희대 임간(林間)교실에서 신문방송학과 신입생환영회가 열렸다. 초청받아 간 그 자리에서 그 학과 학생이던 김세환이 노래를 불렀다. 부드러운 발성과 창법이 자연스러웠고, 노래 분위기를 잘 파악했다. 노래를 듣는 데 부담스럽지 않았다. 당시 사회자의 소개말로 그가 연극인 김동원씨의 아들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김세환이 1970년 봄 경희대 임간교실에서 열린 신문방송학과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해 여학생들과 포즈를 취했다. 그는 당시 가수 데뷔 전으로 이 학과 학생이었다.

같은 해 여름, 충남 보령시 대천해수욕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우연이었다. 그는 가족들과, 나는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갔다. 해변에서 그가 아는 체를 했고 쉽게 어울렸다. 그의 유머 감각은 대단했다. "야, 웃겨봐"하면 전등 스위치를 올리듯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훈아·김상진·서영춘씨 흉내도 똑같이 냈다.

잘 됐다 싶었다. 김세환은 소년 같은 귀염성도 있었다. 결혼 전이었던 나와 친구들은 '파트너'를 찾으러 해변에 나온 차였다. 그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내가 메모를 적었다. '트윈폴리오 윤형주입니다. 별장에 초대해도 될까요.' 그가 메모를 가지고 괜찮은 여학생들에게 다가갔다. 운이 나빴다. 김세환이 말을 거는데 뒤에서 남자들이 다가왔다. 여학생들과 함께 온 일행이었다. 맞아 죽을 뻔했다고 훗날에도 가끔 그가 나를 타박한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이번엔 내가 직접 나섰다. 밝아 보이는 여대생 네 명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윤형주입니다."

그들은 금세 나를 알아봤다. 자연스레 별장에 초대했고 그들이 응했다. 내가 초대했으니 응당 잘 해줘야겠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대천시장에 홀로 나섰다. 고기와 찬거리를 사는 등 정성껏 장을 봤다. 멋들어진 저녁 식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별장에 돌아오니 달갑지 않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를 포함, 남자 다섯 여자 넷이었는데 나 없는 사이 자기들끼리 이미 짝을 정한 것이다. 공평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을 불러 말했다. "야, 파트너를 이미 다 정해놓으면 나는 뭐냐?" 천연덕스레 그들이 답했다. "넌 리더잖아." 그때 처음 리더의 쓰라린 심정과 외로움(?)을 느꼈다.

리더로서의 일은 더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여대생 둘이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다른 둘은 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 둘이 집에 가야겠다는 친구 둘을 말려봤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당당하게 말했다."이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들만의 노래를 만들게요. 그 노래가 마음에 들면 떠나지 마세요." 모두 동의했다.

그 길로 나는 방에 들어가 노래를 만들었다. 해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소재들로 가사를 썼다. 밤은 깊어가나 잠이 오지 않는 여름 밤, 밤새 모기가 물어도 그저 즐거운 모임, 김치만 있어도 맛있는 아침 식사. 가사는 썼는데 오선지가 없었다. 세환이와 친구들이 부랴부랴 빈 종이에 오선지를 그려줬다. 30분 만에 작곡과 작사를 끝냈다. 이제는 '조개 껍질 묶어'란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곡, '라라라'였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김세환이 "형, 진짜 좋다"며 박수를 쳤다. 여학생들도 좋아했다. 당연히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듬해 노래를 발표했다. 김세환과 함께 만든 앨범 '별밤에 부치는 노래 씨리즈 V. 3'에 실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후 해수욕장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여름 노래로 남았고 2005년엔 보령시 이시우 시장 주도로 대천해수욕장에 '라라라' 노래비가 세워졌다.

[키워드]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조개 껍질 묶어]

[트윈폴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