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장은 나의 자신감!… 반성문? 신경 안 써요" 초등학교 6학년 A양의 학교 사물함은 틴트, 립글로스, 비비크림,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메이크업베이스 등 화장대를 방불케 한다. 점심시간이나 마지막 수업 전 쉬는 시간에 화장실이나 미술실처럼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기초화장을 하고 하굣길에 아이라이너와 마스카라로 마무리한다. A양은 "화장을 하면 피부도 하얗게 보이고 눈도 커 보여 자신감이 생긴다. 학교에서 화장한 것을 들켜 반성문을 쓴 적도 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2 "엄마 몰래 초등 5년부터 시작했죠" 중학교 1학년 B양은 친구들과 시내에 나갈 때면 컴퓨터 책상 아래 A4 용지 상자를 꺼낸다. 상자 안에는 엄마 몰래 모아둔 화장품이 가득하다. 변신 장소는 주로 상가 화장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화장을 시작한 그는 능숙한 솜씨로 20분이면 풀 메이크업을 마친다. 인터넷에서 배운 화장법으로 친구들에게 '비법'을 전수하기도 한다. 집에 돌아갈 때는 폼클렌저로 화장을 꼼꼼하게 지운다.
◆"화장하면 노는 아이?" 이젠 옛말!
화장하는 소녀들이 늘고 있다. 주말이나 휴일 서울 명동과 코엑스, 노원역 등 청소년들이 자주 모이는 지역에서는 화장한 여학생들이 쉽게 눈에 띈다. 중고생은 물론 초등학생도 예외는 아니다. 성인과 마찬가지로 피부색 보정용 선크림에 간단한 아이라인을 한 학생부터 마스카라에 붙임 속눈썹, 볼 터치까지 진한 화장을 한 학생까지 다양하다. 4~5명씩 모여 화장품 로드숍에서 쇼핑하거나 편의점에서 간식을 먹으면서 서로 써본 제품의 장단점을 얘기해주는 모습도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노원역 인근 청소년 아케이드 게임장 체인점 관계자는 "방학이라 하루 1000명 정도 청소년이 매장을 찾는데 화장을 안 한 여자아이들이 거의 없다. 예전에는 화장하면 소위 '노는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자기 표현의 한 방법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학교 1학년 이유정양은 "성적과 관계없이 한 반의 절반 정도는 화장한다. 진한 색조화장을 하는 경우는 오히려 따돌림을 당하지만 아이라인 정도는 다들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에 '초등생 화장법' 등 정보 수두룩
인터넷에는 '초등학생 화장법' '학교에서 안 걸리는 화장법' '시내 나갈 때의 아이라인법' '얼짱 화장법' 등의 정보가 쏟아지고 있다. 중고생 '화장 선배'들이 올린 '초등학생 화장법'에는 기초화장부터 포인트 메이크업, 클렌징까지 세세한 설명과 함께 구체적인 화장품 제조사, 제품명, 가격대도 소개하고 있다. "화장을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학부모도 많다. 중학생 딸이 쓸 화장품을 직접 골라준다는 C씨는 "'무조건 화장은 안 돼'라고 막아 몰래 화장하고 다니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선택권을 주고 과하지 않게 화장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인보다 피부 두께가 얇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경우 흡수율이 높아 색조화장품을 사용하면 가려움 발진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문방구 등에서 파는 장난감용, 인형 장식용 화장품의 경우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아 더욱 위험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지난 3월부터 만화 캐릭터나 도안을 용기·포장에 표시해 어린이용으로 오인될 수 있는 립스틱, 아이라이너 등 색조화장품의 제조·수입·판매를 단속해왔다.
식약청 관계자는 "지자체 등과 함께 단속을 벌여 어린이들을 현혹하는 불법 화장품 판매는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일반 성인용 화장품을 구매하는 경우 관련 법규가 없어 제재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어른이 되고 싶은 욕구' 탈선 우려도
화장 자체의 부작용보다 2차적 유혹에 노출되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서울시교육청 남미숙 장학관은 "발달과정상 여학생들이 화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예쁜 옷을 입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욕구의 표현인 경우 자칫 흡연이나 음주, 성적인 자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말했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D양은 초등 5학년 때부터 화장을 했다. "여자아이니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에 부모도 화장을 허락했다. 예쁘장한 외모에 옷차림도 화려했던 D양은 이 때문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인근 학교에서 찾아온 '튀는' 남학생과 여자 선배들로 마음고생을 했다. 같은 학년 친구들을 통해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낸 남학생들이 시도때도 없이 연락해오고 여선배들은 미니홈피 쪽지로 '양'(양언니 동생 사이를 뜻하는 속어)을 맺자고 제안했다. D양과 부모는 미니홈피와 휴대전화를 정지시키고 화장을 자제하는 등 변화를 주었지만 한번 탄 유명세는 6학년 말까지 지속됐다.
학부모와 교사, 학교는 물론 교사와 교사 간에 기준이 다른 점도 지도에 어려움을 준다는 지적이 있다. 행현초 이혜림 교사는 "어디까지가 화장이고 아닌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 귀고리나 두발의 경우 오히려 초등학교에서는 허용되던 것이 중학교에서는 제한돼 반발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남 장학관은 "화장 자체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학생과 학부모, 학교 간에 공감대를 형성해 일관된 기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혼란을 막을 수 있다. 숨기기보다는 공론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