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아버지)나 Mother(어머니)에 'Grand'를 붙이면 할아버지·할머니란 뜻이 되는거야."
지난 22일 오후 5시 40분쯤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주민센터 2층 회의실. 경기경찰청 외사계 김세민(33) 경장이 7명의 중학생들과 영어수업에 한창이었다.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은 가정형편 때문에 학원을 다니기 어려운 저소득층 가정 자녀들. 경기지방경찰청은 여름방학을 맞아 지난달 27일부터 소외계층 청소년들을 위한 '외국어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3명의 강사와 15명의 아이들이 여름내 땀을 흘렸다.
수업에 참여한 김모(14·수원 영화여중)양은 "방학이라 놀고 싶었는데 엄마가 영어 수업을 신청해 처음엔 내키지 않았다"며 "이제는 영어 문장 구성이나 문법도 배우고 곧 원어민 선생님도 오신다고 해서 기대된다"고 했다.
최모(14·수원 제일중)군도 "아빠의 권유로 수업에 참여했지만 경찰관 선생님이 친절하게 기초부터 알려줘 이제는 계속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수업에 참가했던 아이들이 쉽게 영어에 흥미를 느낄수 있었던 것은 강사로 나선 별난 이력의 경찰관들 덕분이었다.
이날 수업을 진행한 김세민 경장은 수의사 출신으로 강원대에서 박사까지 수료했다. 김 경장은 2003년 6월부터 3년간 외교부 한국국제협력단(KOICA) 소속 국제협력요원으로 근무했고, 2006~2008년에는 정부파견 수의사로 스리랑카에서 활동했다. 그는 스리랑카 광견병통제센터 설립과 조류인플루엔자 대비책 수립, 쓰나미 복구 공로 등으로 스리랑카 보건부·농축산부·대통령실 보좌관으로까지 임명됐었다. 그의 활약상은 2007년 초 한 지상파 방송사 다큐멘터리로 소개되기도 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그가 경찰에 입문하게 된 것은 스리랑카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그는 "스리랑카에는 우리 교민을 보호할 수 있는 한국 경찰인력이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 한국인들이 억울하게 유치장 신세를 지는 경우가 생겼다"며 "현지에서 스리랑카어(신할리어)를 잘해 한국인을 도울수 있는 경찰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막상 경찰이 되겠다고 하자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잘나가던 수의사를 그만두고 갑자기 경찰이 되겠다고 하니 부모님은 "왜 하필 네가 그걸 해야 하느냐"고 말렸다. 수의사인 아내 역시 결혼하자마자 스리랑카로 떠났던 남편이 이번엔 경찰이 되겠다고 하자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 가족들의 동의를 얻었다. 스리랑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2009년 경찰청 외사정보과 행정인턴을 거쳐 작년 10월 외사특채(스리랑카어)로 경찰에 입문했다.
그는 "경찰로서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보니 학교 선생님과는 다른 관점에서 그들을 대할수 있었다"며 "수업이 끝나면 수원역이나 시내 이곳저곳을 배회해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아이들이 저를 통해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정애란(32·경기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경장은 전문 영어강사 출신이다. 2001년부터 5년간 대구에서 영어강사로 일했던 정 경장은 2007년 11월 경찰에 입문했다. 경찰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영어강사로 일하던 중에도 꾸준히 경찰시험을 준비했었다.
그는 "일반 학원에서는 학생들이 대부분 사교육을 경험한 상태라 기초실력이 충분한데 저소득층 아이들은 기본적인 내용들도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며 "기초실력을 쌓으며 영어에 흥미도 가지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반응이 좋아 앞으로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할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소영(32·수원중부서 교통조사계) 순경은 용인대 경호학과 출신으로 태권도 5단, 유도 1단, 검도 1단에 합기도까지 연마했다. 가족들의 태권도 단수를 합하면 20단에 가까운 무도인 집안에서 자란 강 순경은 대통령이나 VIP 경호원을 목표로 영어공부를 시작했었다. 2001년 캐나다 캘거리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하며 실력을 키웠다. 2003년부터 3년간 미8군에서 일했고, 2008년 경찰이 됐다.
경찰이 된 뒤에도 그는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2009년 한·아세안 정상회담 때 통역요원으로 활동했고, 작년 9월 각국 정보ㆍ수사기관이 참여한 국제마약공조회의 회의진행 통역을 맡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영어 발음을 따로 배울 기회가 없다는 말을 듣고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며 "짧은 기간이지만 영어를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는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김태수 경기경찰청 외사계장은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방과 후 외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청소년 치안활동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시도"라며 "학생들의 반응이 좋아 방학 때만 가르치기로 했던 계획을 연장해 학기 중에도 계속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 계장은 "앞으로 영어뿐 아니라 외사계 경찰의 능력을 활용해 아랍어·중국어·일본어 등 다른 언어까지 프로그램 확대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