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일(一)자형의 건물, 그 안에 곧게 뻗은 복도, 복도를 따라 늘어선 교실들…. 한국 중·고등학교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너무 천편일률적이어서 원래부터 학교는 그렇게 지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교육열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국. 하지만 그동안 교육에만 열을 올린 나머지 교육이 이뤄지는 공간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었다. 건축가 배병길(55·사진)씨가 지난해 담당한 경북 김천시 김천고등학교의 교사(校舍) 증축 설계는 학교 건물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주는 프로젝트이다.

"한국의 학교 건물은 새장 같다. 새장에 갇혀 모이를 받아먹는 새들처럼 학생이 일방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받게 되는 구조이다. 창의성이나 다양성을 기를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지난주 김천고에서 만난 배씨는 "학교 공간의 교육적 의미를 고민하는 기폭제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번 프로젝트에 임했다"고 했다.

배씨는 '국제화랑' '갤러리 현대' 등 전시공간과 주택을 주로 설계해 왔다. 고등학교 교사를 설계한 것은 처음이다. 교과교실제(학생들이 과목별로 지정된 교실로 이동해 수업을 받는 제도) 시행으로 교실이 추가로 필요해지자 김천고에서 모교 출신 건축가인 배씨에게 증축 설계를 부탁했다.

옛 교사 건물에 연결해 지어진 새 교사는 알루미늄 패널로 마감해 붉은 벽돌의 옛 건물과 대조된다. 건축가는“면학분위기가 중요한 학교 건물인 만큼 기발하고 독특한 형태보다는 수직성을 강조해 정돈된 느낌을 줬다”고 했다.

교과교실제는 설계 과정에서도 중요한 고려 요소였다. 학생들이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해 기존 건물 2개와 새 교사까지 총 3개의 건물이 만나는 지점을 벽으로 가리지 않고 최대한 개방했다. 배씨는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이동하면서 운동장 너머 멀리까지 탁 트인 광경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고 했다.

쉼표 역할을 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데도 신경을 썼다. ㄷ자 모양의 증축 교사는 총 4층이다. 2층과 같은 높이인 ㄷ자의 가운데 부분을 중정(中庭)으로 활용했다. 중정 한쪽은 수직 터널처럼 1층까지 파냈다. 빛이 1층까지 스며들도록 한 '빛 우물'이다. 3층에는 다목적 휴게실을 마련하고, 4층에는 ㄷ자의 한 변을 작은 마당처럼 만들었다. "(기존 학교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은 교실을 빼면 화장실 정도였다. 친구들과 대화하고 토론하거나 혼자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수업시간뿐 아니라 그런 것도 교육의 중요한 과정이다. 그래서 용도가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열린 공간'을 많이 만들었다."

증축 교사의 2층 높이에 중정을 두고 한쪽을 수직터널처럼 파내 1층까지 빛이 도달하게 했다. 1층이 지하처럼 보이지만 건물 반대쪽은 지상으로 열려 있다.

외장을 알루미늄 패널로 마감한 이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옛 건물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배씨는 "건축은 그 시대의 기술과 소재로 표현돼야 한다"며 "무조건 옛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해야 역사성을 보존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다만 새 건물을 가리는 옛 교사를 헐어버리자는 이야기에는 단호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건물은 일주일이면 헐 수 있지만, 일단 무너뜨리고 나면 1931년 개교 당시부터 그 건물에 기록돼 온 역사는 되살릴 길이 없기 때문이다.

수업하는 동안 학생들의 시선이 운동장으로 분산되지 않도록 반투명 유리를 쓴 교실. 창틀 간격을 달리해 단조로운 느낌을 피했다.

국내에서 건축가가 중·고등학교 설계를 맡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산 때문이다. 등록금을 시설 투자비로 쓸 수 있는 대학과 달리 중·고등학교는 교육청의 지원금에 의존한다. 배씨는 "예산 지원의 기준이 되는 품셈은 '화장실은 화식 변기(쪼그려 앉는 변기), 외벽은 철근 콘크리트' 식으로 정해져 있다"며 "지원금만으로 건물을 지으면 전형적인 학교 건물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고 했다.

배씨의 이번 '실험'은 교육청이 지원한 3.3㎡당 공사비 260만원에 학교 재단의 추가 지원금 3.3㎡당 140만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처음 설계안을 마련하고 모형을 보여줬을 때 학교측에서는 '돈을 더 들여가면서 이렇게까지 잘 지을 필요가 있나'라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배씨는 "이번에 한 번 지으면 앞으로 50년은 못 바꾼다. 돈이 좀 더 들더라도 후배들에게 공부하고 싶은 학교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설득했다.

2개의 구(舊) 교사와 새 건물이 만나 통하는 입구와 통로를 벽으로 둘러싸지 않고 개방해 학생들이 건물을 이동하는 동안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영세한 지방 시공사의 시공능력이 속을 썩이기도 했다. 노출 콘크리트 부분에 설계에는 없는 홈을 파서 장식을 만들어놓는 식이었다. 설계대로 시공되는지 살피기 위해 서울~김천을 61번 왕복했다. 그는 "학교는 가장 교육적인 공간이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한국의 학교 건물은 공부를 하도록 강요하는 공간이었을 뿐"이라며 "학생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