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시내 중심부에 있는 영국의 대표적 재래시장 '스피탈필즈 마켓'(Spitalfields market). 1682년 식료품 전문 시장으로 출발해 330년 역사를 자랑한다기에 낡고 허름한 건물을 예상했건만 대형 통유리벽 외관이 마치 새로 지은 금융회사 건물 같았다.
시장 안쪽엔 동대문 패션타운 같이 작은 매대 백여개가 꽉 들어차 있었다. 연방 사진을 찍어대는 관광객과 물건을 사러온 동네 주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팝 가수 마돈나와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도 이곳에서 물건을 사는 모습이 포착되면서 유명세를 얻어 주말이면 최대 60만명 가까이 모인다. 평일에는 각종 유기농 채소·과일에서부터 골동품, 의류, 생활용품 등을 판다.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시장이 운영된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역시 런던 시내 중심부에 있는 식료품 전문 시장 '보로 마켓(Borough market)'과 '콜롬비아 꽃시장' 정도가 200~300년 역사를 유지하며 런던을 대표하는 전통 시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들이 '그냥' 살아남은 건 아니다. 변화와 개혁을 겪으면서 대형 수퍼마켓들과 경쟁하고 있다.
◆재래시장, 그 지역의 '랜드마크' 되다
'스피탈필즈 마켓'은 올 초 '전영시장(全英市場)협회'로부터 "전통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혁신으로 대중을 가장 많이 끌어모으고 있다"는 이유로 '최고의 시장'으로 선정됐다.
시장 상인들과 소비자들이 꼽는 최고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천장'이었다. 스피탈필즈 마켓의 마크 루이스 마케팅 담당은 "우아한 유리 천장으로 변덕스러운 영국 날씨에도 시민이 편안한 쇼핑을 할 수 있게 했다"며 "시장 바로 앞은 공원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편안하게 일광욕하며 쉴 수 있게 했다"고 밝혔다. 보통 '시장통'하면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불편한 곳을 떠올리는데 리모델링을 통해 시장을 '쉼터'로 바꾼 것이다. 시장에선 패션쇼부터 요리 경연 대회 등 다양한 이벤트도 열린다.
영국의 대표적 건축가 노먼 포스터 설계로 7년여 작업 끝에 2008년 마무리했다. 처음엔 초고층 높이의 전문 상가로 완전히 모습을 바꾸려 했지만 '과거 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시민들 요구가 거세져, 10주간 시민 의견 청취를 거쳐 벽돌로 지어진 시장 겉모습은 그대로 유지했다.
천장이 바뀌어 '랜드마크'로 떠오른 곳도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재래시장인 산타 카테리나(Santa Caterina) 시장. 250년 역사를 지녔지만 낙후한 지역 살림에 문을 닫을 뻔한 위기를 혁신 디자인으로 극복했다. 스페인 유명 건축가 엔릭 미라예스가 과일·채소 모양을 형상화한 타일 32만5000개로 지붕을 만들어 2005년 선보였다.
바르셀로나 엘리사바디자인 학교 유혜영 교수는 "시민, 관광객 모두에게 득이 되는 디자인으로 지역이 재개발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최상 품질은 재래시장으로 모인다
영국에서도 대형 마켓의 몸집 불리기는 사회 이슈가 되고 있다. '테스코' 등 흔히 '빅4'라 불리는 대형 수퍼마켓이 소매시장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 방송 BBC에 따르면 이들이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신규 점포 500여개를 내자, 2009년도 한 해 동안 영세 업체 1만2000여곳이 폐업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형 점포의 몸집 부풀리기에 서민 자영업자들은 생계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하지만 성공한 재래시장의 아성은 대형 수퍼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다. 채소·과일·치즈·빵 등 유기농 먹을거리 전문인 '보로 마켓'의 경우 영국 유명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가 매주 쇼핑을 가서 더욱 유명해졌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이들의 매출은 1년에 44억원에 달한다. 야채·치즈 도매업자인 캐서린 콘웨이는 "각종 품평회 등을 통해 최고 품질을 입증받은 제품만이 이 시장에 들어올 수 있다"며 "직거래이기 때문에 일반 소비자들도 마트보다 20~30% 싸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