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폭력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명제가 통하는 세상인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고대부터 인류 사회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학살, 고문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레바논계 캐나다인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그을린 사랑'은 이런 폭력과 분노의 사슬에 관한 얘기다. 쌍둥이 남매인 잔느(멜리사 디소르미스-폴린)와 시몽(맥심 고데테)은 어머니 나왈(루브나 아자발)의 유언을 따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생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아 중동으로 떠난다. 그 과정에서 전쟁과 폭력 속에서 무참히 일그러진 나왈의 놀라운 과거와 쌍둥이 남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한국에서의 제목은 '그을린 사랑'인데, 영화는 단순히 그을리는 수준이 아니라 폭발적이다. 충격적인 반전 뿐만 아니라 정교한 연출과 촬영, 주·조연의 흠 잡을 데 없는 연기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서사시를 만들어냈다.

레바논계 캐나다인 작가 와이디 무아와드의 네 시간짜리 연극을 각색한 영화는 특정 국가나 시대를 언급하진 않았다. 그러나 감독과 작가의 출신지나 영화 내용을 보면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삼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감독은 "분노의 연쇄고리라는 주제에 보편적 힘을 부여하기 위해 실제 사건들을 시적으로 변용했다"며 "영화로 각색하면서 나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는데 힘을 쏟았다"고 했다.

'그을린 사랑'은 반전 영화이기에 앞서 기록과 약속에 관한 영화이다. 나왈이 감당하기 힘겨운 진실을 자식들에게 알리려는 시도 자체가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잔느와 시몽이 어머니의 과거를 마주하길 주저할 때마다 나왈의 공증인 르벨이 등장해 남매에게 기록과 약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잔인하고 슬픈 역사라 할지라도 그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전쟁 속에서 모든 사랑을 그을려야 했던 한 여인의 삶을 보여주고도 끝내 긍정적이다. 나왈은 분노와 폭력으로 점철된 진실을 마주한 자식들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덕분에 마침내 약속을 지켜냈구나. 흐름은 끊어진 거야. 너희를 달랠 시간을 드디어 갖게 됐어.' 결국, 사랑이 폭력을 이길 수 있다는 얘기다. 21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