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수많은 그림을 한 장씩 그려서 완성하는 ‘셀 애니메이션’(cell animation)이라는 양식이란, 이쯤 되면 진한 그리움이 담긴 빈티지 스타일의 하나라고 말해도 괜찮을 듯합니다. 안재훈· 한혜진 감독의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무척 단순합니다. 인간이 달에 첫 착륙하던 시절, 지방 도시의 여고생이 우주여행이 꿈인 남학생과 가슴 아릿한 첫사랑을 나누는 게 기둥 줄거리입니다. 이렇다 할 극적인 사건도 없고, 관객을 긴장시키는 인물간의 팽팽한 갈등 같은 것도 별로 찾기 힘듭니다. 하지만 아름답게 그려낸 배경과 인물들, 전편에 흐르는 익살과 유머와 재치, 꿈 많던 시절을 추억하게 해 주는 꼼꼼한 디테일들이 나의 기분을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중한 날의 꿈'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사실은 이 작품이 택한 옛날 방식의 셀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 자체가 향수를 자극하는 첫 번째 요소입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면 ‘쉬렉'에서 ’쿵푸 팬더'까지, 3D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드는게 상식처럼 된 2011년에 셀 애니메이션을 보는 기분은 특별합니다. 촌스럽다기보다는 푸근합니다. 이른바 ‘만화체’의 선으로 그려져있는 인물들, 평평한 배경 그림들, 그리고 몇 안되는 ‘구분동작’으로 구성되는 인물들의 움직임…. 입체모형을 촬영한 듯 판타스틱한 3D애니메이션만 보다가 모처럼 만난 이 구식 ‘만화영화'에서 나는 세상을 납작하게 재구성해 바라보는 듯한 시각적 재미를 발견했습니다.
낡고 헐었다고만 생각한 옛것에서 신선한 멋과 품위를 찾아낸게 빈티지한 것이라면 이 애니메이션이 그렇다고 봅니다. ’지지직‘ 거리는 LP판의 잡음이나 오래된 영화 필름에 비 내리듯 주루룩 쳐지는 스크래치처럼, 2D 셀 애니메이션의 투박하고 푸근한 맛은 우리의 추억을 자극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아이콘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낡은 것이 주는 편안함에 잠시 빠지게 합니다.
물론 ’소중한 날의 꿈'의 스타일은 미야자키 하아요를 대표로 하는 일본 만화영화의 영향 아래 만들어졌음을 부인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한국 ‘만화영화'엔 일본 ‘아니메'와 구별되는 한국적 특징도 있습니다. 또 2D 애니메이션의 그 독특한 스타일은 기원이 어느나라였느냐에 관계없이 한국인들 추억에 새겨진 한국의 문화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풀어내는 이야기란 이런 빈티지한 그릇에 딱 어울립니다. 공책에 낙서하며 보내던 수업시간, 자기도 모르는 어려운 단어만 골라 썼던 고등학교 때의 습작 시, 김일의 박치기에 환호하던 프로레슬링 시청…. 한마디로 한국의 70년대~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추억들의 총집합입니다. 멀리는 영화 ’친구'로부터 요즘 개봉된 ’써니'에서까지 끌어들인 시대이니 진부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알록달록 만화영화로 그려내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꼼꼼한 제작진은 방에 매달려 있는 파리잡이 끈끈이의 모양새나 처마 밑에 틀곤 했던 제비 둥지의 디테일까지 정교하게 그려냈습니다. 과학의 꿈을 풀어내는 대목에서 작업실에 쌓인 온갖 기계 모양이나 소형 항공기 조종석 모습도 대충 그린 게 아니더군요. 아니나다를까 엔딩 크레딧의 ‘도와주신 분들’ 명단에 여러 과학 전문가 이름이 뜨더군요.
'소중한 날의 꿈'은 기대 이상으로 유머러스하기도 합니다. 테마를 그대로 제목에 써 버린 작명 스타일이 너무 고지식하게 느껴진데다, “이렇게 착하고 건전한 영화 처음 봤다”는 어떤 관객의 평가 때문에 나는 정말로 이 작품이 ‘대책없이 맑다보니 재미도 없는' 애니메이션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작품 곳곳에 사람을 쿡쿡 웃게 만드는 익살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가령, 남자친구가 자기 집을 찾아오자 여주인공이 부끄러워 자기 방의 불을 끄고 나오지도 못하는 대목에서 엄마는 "불은 왜 끄냐! 네가 한석봉이냐?"라고 고함치며 객석을 웃깁니다. 그냥 발걸음을 돌린 남자친구를 황급히 따라가 '미안하다'고 말해준 여주인공이 고개 숙이며 돌아가는 장면에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도대체 왜 이런지 몰라…"라는 나훈아의 트로트곡 '갈무리'가 입혀지면 객석이 또한번 폭소합니다.
주된 다이얼로그와 달리, 들릴 듯 말듯 자그마한 소리로 깔아놓은 이펙트(effect) 대사들도 유머러스합니다. 전학 온 서울 여학생 수민이 '노래나 한곡 불러 봐'라는 급우들의 짓궂은 주문에 김만수의 '푸른 시절'을 부르기 시작하자 까르르 터진 웃음 사이로 "어머! 하라니까 정말 하네!"라는 소리가 스치는 것 같은 대목들이 은근히 많습니다.
‘소중한 날의 꿈'은 초등학생과 유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주 관객층을 중·고교생과 성인으로 잡은 모처럼의 애니메이션입니다. 중년들은 향수에 젖거나 가슴 한 켠이 아렸던 성장통을 추억하겠지만, 10대들에게도 이 작품속 학창 스토리가 그렇게 생소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10대들의 보편적 현실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10대 시절을 돌아본다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단순한 복고라면 퇴행적인 행위에 불과하겠지만, 바쁘게 살아가느라 잠깐 잊고 있었던 저마다의 꿈을 한번 환기해 본다면 가치없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 작품 속 우주비행 계획을 세우는 철수의 모습을 보고, 중학생 시절 단짝 친구와 함께 열기구 비행을 해보려고 설계까지 마쳤던 일을 떠올린 나의 경우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