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2월 20일, 생물학계의 세계적 권위자인 스톡홀름대학 자연과학부장 스텐 베르그만(Sten Bergman) 박사 일행이 서울에 도착했다. 이들은 조선 고유의 동물과 고산식물 표본 채집을 위해 함경도 일대를 조사하고 내려왔다. 당시 조선일보에 따르면 '베록만 박사'는 "조선의 산천은 실로 아름답고 문물은 신선한 맛이 있다"며 "이번에 채집한 것은 서전(瑞典·스웨덴) 국립박물관에 보관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조선일보 기자에게 '미쓰 최'의 안부를 물었다. '미쓰 최'는 우리나라 최초로 스톡홀름대학에서 사회경제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최영숙(崔英淑)으로, 유학시절 스웨덴 왕실도서관에서 동양자료 정리 일을 했었기 때문에 베르그만 박사와 아는 처지였다. 기자가 '그녀가 죽었다'고 전하자 박사는 깜짝 놀랐다.(1935년 2월 23일자)

최영숙이 스웨덴 유학 당시 찍은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옷에‘X’표시된 사람이 최영숙이다. (조선일보1928년 4월 10일자)

이화학당을 졸업한 최영숙은 3·1운동의 영향으로 '작은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가 명덕여학교를 거쳐 회문여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당시 세계 여성운동의 우상인 엘렌 케이(Ellen Key)를 찾아 스웨덴으로 떠났다. 케이는 그녀가 도착하기 석 달 전 이미 세상을 떠났다. 조선일보는 1928년 4월 10일자 부인란에서,'김산형(金山兄)!'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쓴 그녀의 스웨덴 생활을 소개했다. 최영숙은 '수양이란 것은 서적을 읽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지 싸움을 실험하는 데 있다'며, 사회주의적 실천을 강조했다. 아울러 '동양여자의 해방운동'에 대해 강연한다는 소식도 전했다.

최영숙은 6년간의 각고 끝에 1931년 봄 학사학위를 받고, 러시아·독일·프랑스·이집트·인도 등 20여개국을 돌아 본 뒤, 그해 11월 귀국했다. 조선일보는 '조선 초유의 여류 경제학사' '영, 독, 불, 스웨덴, 중국, 일어 등에 능통한 재원'으로, '경제운동'과 '노동운동'에 몸을 던지려 했으나, 가정 형편상 직업을 가져야 하는 처지이고, 신문기자 생활을 하고 싶다는 그녀의 뜻을 지면에 소개했다.(1931년 12월 22일자)

그러나 일제하 조선은 그녀 같은 고급 인텔리 여성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인도 청년과의 사이에 얻은 아기까지 임신 중이었다. 태중에 과로와 경제적 핍박이 겹친 최영숙은 귀국 다섯달 만인 1932년 4월 23일, '28세를 일기로 백화가 만발하는 이 봄을 등지고 영별하고' 말았다. 그녀의 부음을 전한 조선일보 1932년 4월 25일자는, '구십춘광(九十春光)을 등지고 애석(哀惜)!' '20년간의 각고적공(刻苦積功)도 헛되다'고 안타까워했다. 기사에 따르면 그녀의 집은 너무 가난해 당장 매장할 준비조차 못 할 정도였다. '잡지 삼천리'는 최영숙이 어학교수·교사·기자직 등을 구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결국 야채 상점을 차려 배추와 감자, 미나리와 콩나물단을 다듬는 일을 하다 과로에 심장염으로 죽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