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화제를 모았던 2011년 북미프로농구(NBA) 드래프트 최고의 별은 카이리 어빙의 몫으로 돌아갔다.
르브론 제임스를 떠나보내고 실의에 빠져있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구단과 팬들은 새로 지명된 어빙을 보며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됐다. 전체 1번 지명권을 보유한 캐브스는 망설임 없이 만 19세의 포인트가드를 선택했다.
어빙은 6피트2인치(188cm)의 비교적 단신이지만 앨런 아이버슨, 데릭 로즈, 존 월의 대를 이을 괄목할 만한 득점기계로 명성이 자자하다.
물론 어시스트도 잘하지만 득점력이 뛰어난 포인트가드의 계보를 어빙이 이어줄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기대하고 있다.
어빙의 등장은 여러 모로 신선하다. 어빙은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아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신동'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 얼마나 농구를 잘했으면 중학교 시절부터 유명 농구잡지의 표지모델을 장식할 정도였다. 농구선수로는 그렇게 크지 않은 신장이었지만 워낙 기량이 출중해 그보다 훨씬 큰 선수들을 보기 좋게 따돌렸다.
신동이 탄생한 배경에는 전직 프로농구선수였던 아버지가 존재했다. 그의 아버지 드레데릭 어빙은 그러나 '3류 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호주프로농구리그로 날아가 선수생활을 했다. 호주 멜버른에서 카이리를 낳았고 두 살 때까지 호주에서 살았다.
어빙은 그래서 이중국적의 소유자다. 미국과 호주 국적을 동시에 갖고 있어 미래 기회가 된다면 호주농구 국가대표팀 멤버로 뛰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내기도 했다.
어빙은 농구선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운동능력이 탁월했고 어린 시절 아들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또래보다 훨씬 더 탄탄한 기량을 뽐낼 수 있었다.
안정된 기본기 속에 특유의 운동능력과 천재적인 감각이 더해지면서 그는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시절에는 전미국을 대표하는 농구선수 랭킹 1,2위를 다투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특히 고교 당시 얼마나 대단했으면 그를 직접 지켜본 스카우트들이나 전문가들은 그의 기량을 평가함에 있어 이구동성으로 별 5개 만점을 매기기 바빴다.
카이리에게도 유년 시절이 마냥 즐거웠던 건 아니다. 2살 때 미국으로 돌아오고 4살 때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아버지와 숙모들의 손에 의해 키워져야 했던 아픈 과거를 안고 있다.
다행히 숙모들의 따뜻한 보살핌 아래 비뚤어지지 않고 올바르게 성장해 마침내 미국농구계가 모두 인정하는 최고의 유망주로 우뚝 서게 됐다.
아버지는 스스로가 외국을 떠돌며 고생한 탓인지 아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명문 듀크대학교로 입학시켰고 거기서 되도록 아들이 4년을 다 채워 학위를 따줬으면 하고 바랐다.
카이리 역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대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불과 1년도 안 돼 북미프로농구(NBA) 드래프트 무대로 나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에이전트들이 달려들어 감언이설로 설득했다. 주위의 끊임없는 유혹은 부자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고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빨리 큰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카이리 부자는 지난 5월 유명 에이전트와 계약을 맺고 2011년 6월 드래프트 참가를 공식화했다.
단 카이리는 프로로 전향했지만 다음 5년간 오프시즌에는 틈틈이 공부도 열심히 해서 어떻게든 학위를 따서 아버지에게 안기겠다는 새로운 약속을 했다.
아버지는 NBA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이 기회의 간절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것이다. 아들이 자신을 대신해 그것도 드래프트 전체 1번의 영예를 안고 NBA 무대에 뛰어든 걸 보면 한없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카이리는 아버지가 자신과 두 형제를 사실상 홀로 키운 싱글 파파였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카이리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선물조차 해드린 게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매년 아버지의 날은 나에게 엄청난 의미로 다가온다. 나는 아버지와 너무 가깝다. 마치 큰 형 같은 내 자랑스러운 아버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