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행동하는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참기독교인은 떨이로 파는 싸구려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값비싼 은혜를 누려야 한다”고 했다.

"값싼 은혜는 교회의 원수다. 떨이로 팔아버린 싸구려 상품이요, 참회 없는 사죄(赦罪·죄를 용서받음)이고,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그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라는 것이다."(저서 '나를 따르라' 중)

독일의 행동하는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가 한국 개신교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본회퍼는 독일의 개신교 목사이자 평화신학자. 물질문명과 나치즘에 무기력했던 당시 독일 개신교계를 날카로운 비판으로 일깨우며 신앙 본질의 회복을 부르짖었다. 뿐만 아니라 "미친 운전사가 인도로 차를 몰아 사람들이 죽어갈 때는 그 미친 운전사를 먼저 끌어내려야 한다"며 히틀러 암살모의에 가담했다가 1943년 체포돼 나치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9일 처형됐다.

대표적 저서 '나를 따르라'는 1965년 국내 첫 출간 이후 45쇄, '저항과 복종(옥중서간)' '윤리학' '신도의 공동생활' 등 그의 저작은 30~40쇄를 거듭하는 개신교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 이후 본회퍼의 신학을 재조명하고 삶을 정리한 평전 등이 10종이 넘게 출간됐다. 한국본회퍼학회는 최근 '본회퍼선집'(대한기독교서회)을 펴내고 10일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21살 때 쓴 박사학위 논문 '성도의 교제'(1927)부터 히틀러 암살모의로 투옥돼 1945년 4월 9일 처형되기 직전까지 쓴 옥중서신집 '저항과 복종'(1943~45)에 이르기까지, 주요 저작 8권을 국내 본회퍼 연구자들이 직접 옮겼다.

값비싼 은혜란?

본회퍼는 "기독교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값비싼 은혜를 누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치와 야합하고, 물질주의에 치우치고, 신앙의 본질을 외면했던 당시 독일 개신교의 병폐를 '진단'하고, 십자가 예수 중심의 참된 기독교를 회복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놨다. 본회퍼에게 교회다움을 잃고 세상과 똑같이 명예, 권력, 물질을 추구하는 것은 죽은 교회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본회퍼는 참된 기독교인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고 했다. 17세기 이후 인간의 자율성·독자성을 강조한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성인(成人)이 돼 버린 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살거나, 신을 형이상학의 틈을 메우는 미봉책으로 쓰거나, 필요할 때만 해결사처럼 신을 불러냈다. 본회퍼는 이를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위치는 삶과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본회퍼는 또 "고난받는 약한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고 했다. 예수는 신(神)이면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고, 자기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를 화해시켰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교리나 이기적 개인주의를 넘어서 예수와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다. 본회퍼는 '예수는 타자(他者)를 위한 존재' '교회는 타자를 위한 교회'라고도 했다. 본회퍼에게 기독교인의 윤리는 오늘, 여기, 우리들 사이에서 어떻게 "기도하고 정의를 실현"할 것인가에 관한 책임윤리다.

"정의는 평화를 가져온다"

1934년 본회퍼는 덴마크 파뇌에서 "시간이 촉박하다. 내일 아침 전쟁의 나팔소리가 들릴 수 있다"며 '평화를 위한 세계교회회의'를 열 것을 제안한다. 그 5년 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당시 민족주의의 광풍(狂風)에 휩싸인 독일 루터교회는 군사적 행동이 요구될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예수는 우리에게 평화를 만드는 자, 평화의 사도가 되라고 명령한다"고 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 구절대로 '정의는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본회퍼의 '평화회의' 제안은 1990년 서울에서 열린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전(JPIC) 세계대회'로 결실을 맺었다.

현재진행형 신학자

2차대전 이후 세속화신학, 평화신학, 정치신학 등 여러 신학적 흐름이 직간접적으로 본회퍼의 영향을 받았다. 국내에도 1989년 한국본회퍼학회가 설립돼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강성영 한신대 신학대학원장 등 현재 5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며 일본 본회퍼학회와 매년 봄·가을 학술대회도 연다. 유석성 한국본회퍼학회 회장(서울신학대 총장)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교회를 교회 되게 하길 원했던 본회퍼는 흙탕물에 빠진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정화제가 될 수 있는 현재진행형의 신학자"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