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현지시각) 오후 7시. 거리엔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지만 LA 도심 한복판의 'LA Live(라이브)'는 화려한 밤 시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휘황찬란한 조명이 하나둘씩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브닝드레스와 스틸레토 힐(stiletto heel·굽이 가늘고 뾰족한 구두)로 한껏 멋을 낸 젊은 여성들은 나이트클럽 앞에 길게 줄을 섰다. 노천 식당에선 맥주잔을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메리어트호텔 앞 LCD 전광판에는 신작 영화 예고편이 흘러나왔다. 맞은편 작은 공터에선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이곳엔 '매주 월·화·수 오후 6~8시 아메리칸 아이돌 생방송 현장, 바로 여기!'라고 쓴 팻말이 붙어 있었다.
'LA 라이브'는 2008년 문을 연 복합문화공간. 남대문시장(4만2225㎡)의 약 3배인 11만㎡(3만3000평) 부지에 그래미 박물관, 스포츠채널인 ESPN 지국, 미국 NBA 프로농구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홈구장이기도 한 스테이플스센터, 최신식 영화관, 그래미상 시상식 때 배우들 환영회장이자 각종 이벤트가 열리는 노키아 플라자 등 엔터테인먼트 부문별 대표주자가 한데 모여 있다. 또 리츠칼튼·메리어트호텔과 나이트클럽·바(bar), 15개 유명 카페와 레스토랑도 모여 있어 관광객들은 'LA 라이브' 안에서 구경하고, 먹고, 즐기고, 숙박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다.
LA 라이브는 2005년까지만 해도 일부는 주차장, 일부는 빈땅으로 방치돼 부랑자가 어슬렁거리던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연간 1500만명(지난해 기준)이 찾는 LA의 최고 관광명소가 됐다. 지난해 미국 도시연구소(Urban Land Institute)는 LA 라이브를 '도심 복합개발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선정했다.
복합개발이란 대도시 도심에 주거·문화·쇼핑 등 여러 기능을 동시에 갖춘 복합단지를 만드는 것. 이른바 '도시 속 도시(city in city)'라고 할 수 있다. 복합개발은 최근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도심을 되살리자'는 열풍이 불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건국대 이현석 교수는 "복합개발은 단지 안에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을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어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는 효과가 있다"면서 "한국처럼 땅이 좁은 나라는 필요성이 더욱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엔 일본 '롯폰기 힐스'처럼 성공적인 복합개발 사례를 찾기 힘들다. 부동산개발회사인 피데스개발 김승배 대표는 "우리나라는 복합개발을 할 때 무조건 공간부터 만들어 놓은 뒤 나중에 콘텐츠를 채워넣으려고 하다 보니 시대에 뒤떨어지게 마련"이라며 "홍대 앞 젊은이의 거리처럼 이미 갖고 있는 콘텐츠를 상업성과 결합하면 한국판 LA 라이브도 개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LA 라이브의 성공 비결도 바로 콘텐츠다. LA 라이브의 개발·운영을 담당한 'AEG(스포츠·엔터테인먼트사)'의 카산드라 지비시(Zebisich) 수석 홍보담당자는 "오로지 LA만이 할 수 있는 차별화된 프로그램이 성공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NBA 경기와 에미상·그래미상 시상식 행사를 보면서 즐길 수 있는 곳은 전 세계에서 LA 라이브밖에 없다"고 말했다.
몇 년 전까지 LA 다운타운은 대낮에도 사람들이 찾기를 꺼렸다. 관광객들은 할리우드나 디즈니랜드 같은 LA 교외만 보고 다운타운에는 들르지 않았다. 보고 즐길 게 없는 데다 슬럼가여서 치안도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AEG는 과감하게 도심 한복판에 LA 라이브를 개발해 죽었던 도심을 되살려냈다. AEG는 스테이플스센터로 몰려드는 스포츠팬을 하루 종일 묶어둘 수 있는 기능을 찾았고, 그게 바로 엔터테인먼트였다. 스테이플스센터에서 NBA 경기가 열리는 시즌이면 톱스타들이 노키아에서 축하 공연을 한다. 사람들은 낮엔 LA 라이브에서 농구 경기를, 저녁엔 콘서트를 구경하고 밤늦게까지 바와 나이트클럽에서 즐긴 뒤 호텔에서 잠을 잔다. 미국 도시연구소의 조셉 브라운 단장은 "LA 라이브는 다운타운을 24시간 깨어 있는 명소로 만들어 도시 이미지까지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황량한 벌판에 이 소도시를 만드는 데 투입한 투자 비용은 25억달러(약 2조7000억원). 땅과 스테이플스센터는 AEG 소유였고, 원래부터 주민이 살지 않아 토지 보상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었다. 김승배 사장은 "우리는 복합개발에 들어가는 공간 투자비용이 과도하다"며 "서울 같은 대도시에도 효율성이 떨어지는 땅이 많은데 이를 잘 활용하면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