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부천시는 시명을 로마자로 'Bucheon'이라 표기하지만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는 'Puchon Fantastic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약자인 PIFAN을 고수한다. 공공 표지판은 2000년 새 국어 로마자 표기법(MOE)을 따라 바뀌었지만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는 종전 국제 관행에 따라 매퀸-라이샤워(MR) 방식을 고수한 결과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을 둘러싼 혼돈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는 자모음을 합쳐 40개나 되는 우리 말을 26개의 로마자로 일대일 대응시켜 표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숙명 같은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835년 선교사 멧허스트가 한글책 번역을 시작한 이래 한글의 로마자표기법은 40여 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그 중 한동안 국내외에서 자리를 잡은 것이 매퀸-라이샤워(MR) 표기법이었다. 개신교 선교사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나 한글학자 최현배(1894~1970) 선생 밑에서 한글을 공부한 조지 매퀸과 하버드대 동아시아 전문가인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가 1937년 고안한 표기법이다. 특징은 한국어 발음이 서양어에 가깝게 나타내도록 했다는 데 있다.

'부산' 표기 혼선 - 국어 지명의 로마자 표기법을 둘러싼 혼선을 보여주는 사례들. 2000년 우리 정부가 새 표기법을 고지한 이후에도 국내에서조차 부산이‘Busan’과‘Pusan’으로 혼용돼 왔다.(왼쪽)

우리 정부도 1948년 MR 방식을 따랐다. 하지만 문제가 없지 않았다. 가령 청주와 정주가 모두 Chongju로 표기됐다. "미군이 정주 폭격 명령을 받고 청주를 폭격할 뻔했다"는 비아냥이 나왔다. 1959년 정부는 소리와 관계없이 글자대로 표기하는 전자법(轉字法)을 채택했다. 하지만 MR 방식이 혼용되면서 혼돈이 따랐다. 독립문이 'Dogribmun'(개갈비문)이 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정부는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외국인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1984년 다시 MR 방식을 채택했다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2000년 다시 새 표기법을 발표했다. 당시 국어연구원은 MR 방식이 '정보화 시대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어려우며 국어에 꼭 필요한 구별이 지켜지지 않았다"면서 "새 표기법은 특수부호 없이 26개 로마자만으로 우리 표준발음에 가장 가까운 표기를 사용하고, 한국어의 특성을 살려 우리말을 편리하게 로마자로 옮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ㅓ' 'ㅡ' 발음 표기에 쓰이던 반달표(˘)와 격음에 쓰이던 어깻점(´)을 없앴고 그전까지 유무성 차이를 철저히 구별하던 것을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고쳤다. ㄱ ㄷ ㅂ ㅈ은 g d b j로 통일하고 ㅋ ㅌ ㅍ ㅊ은 그전까지 k t´ p´ ch´로 적던 것을 k t p ch로 간소화했다.

이번에 영미 양국 정부가 한국 지명 표기에서 한국의 로마자 표기법을 따르기로 한 것은 그동안 로마자 표기를 둘러싸고 나라 안팎에서 무성했던 혼선의 한 가닥이 풀린 것을 뜻한다. 국제 사회에서 로마자 표기법의 주요 국가인 영미가 한국의 로마자 표기법을 따르겠다고 밝힘에 따라 다른 외국들도 이 방향으로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부천영화제 사례에서 보듯 국내에서조차 표기법이 통일되지 않고 있고 북한 역시 독자적인 표기법을 고수하고 있어 국내외 통일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