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국부(國父)'라 불리는 리콴유(李光耀·88) 고문(顧問)장관이 14일 내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싱가포르가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나던 1959년 총리에 올라 1990년까지 31년간 총리로 재임했고 이후에도 선임장관과 고문장관으로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다가 52년 만에 사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번 결정은 지난 7일 싱가포르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인민행동당이 사상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야당은 사상 최다 의석(6석)을 확보한 지 일주일 만에 이뤄졌다. 2대 총리를 역임한 고촉통(吳作棟·70) 선임장관도 이날 리 전 총리와 함께 내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고문장관(초대 총리·가운데)이 지난달 27일 총선을 앞두고 집권 여당인 인민행동당의 후보 지명 센터에 나타나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리 전 총리는 14일“이제 젊은 세대가 싱가포르를 이끌고 나갈 때가 됐다”며 내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싱가포르 세대교체 신호탄

리콴유는 내각 사퇴 의사를 밝히는 성명에서 "새로운 정치 상황을 검토하고 이것이 싱가포르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젊은 세대가 더 어렵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싱가포르를 이끌고 나갈 때가 왔다"고 밝혔다. 그는 "젊은 내각이 젊은 세대와 함께 싱가포르의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들이 싱가포르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자신은 물러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리콴유의 사퇴 결정은 후진적인 정치 상황에 대한 젊은 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지난 총선에서 52년간 집권해온 인민행동당의 득표율이 60.1%로 역대 최저를 기록하자 뉴욕타임스는 "싱가포르에서 20~30대를 중심으로 '정치 후진국'이라는 현실에 불만을 갖는 층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선거 전까지 싱가포르에서 야당은 큰 의미가 없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야당 지도자가 정부나 여당을 비판할 때 발언 속에서 일일이 꼬투리를 잡아 거액의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방식으로 야당의 정치 활동을 위축시켰다. 언론도 철저히 통제해 싱가포르 내에 정부에 대한 실질적인 반대의 목소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선진국에선 볼 수 없는 사실상의 권력 세습도 이뤄졌다. 2004년 취임한 리셴룽(李顯龍·59) 총리는 리콴유의 장남이다. 고촉통 총리 재임기간(1990~2004년)을 제외한 나머지 시기는 리콴유 부자가 총리직을 독점해온 것이다.

리콴유는 지난달 선거 유세 과정에서 야당의 지지율이 상승하던 한 선거구에 대해 "야당을 뽑으면 5년간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오히려 야당 표를 결집시키는 역효과를 내 야당 의원이 당선됐다. 국민 정서를 잘못 읽은 것이다. 외신들은 리콴유가 최근에 나타난 이같은 변화에 부담을 느껴 내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막후에서 영향력 행사할 것

리콴유가 내각에선 사퇴하긴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현직 총리가 그의 장남이고, 국회의원직도 유지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싱가포르의 국부(國富) 펀드를 운용하는 기관인 싱가포르투자청(GIC) 이사회 의장도 그대로 맡고 있다. 영국 BBC는 "리콴유의 내각 사퇴에도 불구하고 리콴유 부자의 권력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리콴유는 지난달 26일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서 "싱가포르 통화의 강세를 유지하는 게 인플레이션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등 최근까지도 정부 정책에 대해 '훈수'를 둬왔다. 최근 그의 건강 이상설이 나돌기도 하지만 지난달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기술 강국으로 부상하기까지 최소 20년 이상 소요될 것"이라고 말하는 등 언론에 심심치 않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 법대를 나온 그는 1950년 귀국, 1954년 인민행동당을 창당했다. 1959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의 승리를 이끌어 싱가포르 자치령 총리가 됐다. 1990년 총리에서 물러난 뒤엔 선임장관을 지냈고 2004년 장남이 총리에 오른 후부턴 고문장관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