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나항공의 B-777기종 모습

“비행기 이륙 불허. 기체를 돌려 주기장(駐機場)으로 오시오.”

지난달 30일 오후 9시10분쯤(현지시각), 영국 런던의 히드로 공항. 영국 경찰의 막무가내 요청에 승객 289명을 태운 아시아나항공의 거대한 보잉-777 기체가 마지못해 육중한 몸을 돌렸다. 9시 출발 예정이던 인천공항행(行) OZ522편은 이미 주기장을 한참 벗어나 활주로에 접어든 상태였다.

4일 아시아나항공에 따르면, 영국 경찰이 구체적인 물증도 없이 “한국인 승객이 지갑을 훔친 것 같다”는 진술만으로 지난달 말 이륙 직전인 한국 여객기를 세우게 하고, 기내를 수색하는 소동을 벌였다. 항공사 측은 “구체적인 물증도 없이 이륙 직전의 비행기를 되돌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영국 경찰이 국제법을 어긴 것은 아닌지 런던 현지에서 법률 자문을 하는 등 법적 대응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브라질 국적의 남성 B씨가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면서 시작됐다. 그는 아시아나항공의 탑승구 앞에서 “공항 면세점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면세점 직원이 ‘한국 여성이 훔친 것 같다’고 말을 했다”며 “지갑을 가져간 여성을 찾아달라”고 했다. 면세 기념품 가게 직원이 “한국 여성으로 보이는 여성이 지갑을 가져간 것 같다. 서울로 간다고 하더라”고 말한 것이 실마리가 됐다.

이에 아시아나 측은 B씨에게 직접 탑승 대기 중인 손님을 출구 앞에서 찾아보도록 안내했다. 또 기내로 들어가는 승객들 모습도 면세점 직원과 함께 차례차례 보도록 해줬다. 하지만 B씨는 아시아나 측에 “항공기에 탑승해 지갑을 가져간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아시아나 관계자는 “아시아나 항공권을 소지하지 않은 손님은 신원 확인도 안 된 상태이므로 다른 손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절대 기내 탑승을 허락할 수 없다”며 “더구나 영국인 면세점 직원이 어떻게 한국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지갑을 훔친 사람이 ‘한국인’이라고 증언했는지도 의문”이라고 맞섰다. 그리고 “면세점에서 지갑을 습득한 분을 찾는다”는 기내 방송을 4차례 실시했다.

소동은 그렇게 끝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결국 비행기는 활주로까지 들어선 오후 9시10분쯤 기체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영국 경찰이 비행기를 돌리라고 긴급 연락을 해온 것이다.

아시아나 측은 "이미 탑승 중인 손님을 확인했는데, 무슨 근거로 항공기를 되돌리라고 하느냐"며 반발했지만, 영국 경찰은 "확실한 증인이 있고 도난 사건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며 막무가내였다.
   
OZ522편이 활주로에서 벗어나 주기장으로 되돌아온 오후 9시30분쯤, 영국 경찰 한 명이 면세점 직원과 함께 결국 기내로 들어왔다. 10분 넘게 승객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살폈지만, 결국 지갑을 가져간 사람은 찾지 못했다.
  
영국 경찰은 기내 수색까지하고도 범인을 찾지 못하자 마지못해 이륙을 허가했다. 그로 인해 오후 9시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는 오후 10시20분에야 이륙할 수 있었고, 승객 289명은 애꿎은 시간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아시아나 관계자는 "영국 공항공단에 공식 항의서한을 발송하고 영국 경찰에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