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로베르토 로드리게즈 감독의 ‘마셰티(Machete)’는 우리나라 다수 관객들에겐 재미보다는 혐오감만 잔뜩 느끼게 할 만한 영화입니다. 무엇보다도, 잔혹한 장면들의 표현 수위 때문입니다.
영화 시작하고 10분 내에 스크린에서 10명쯤 죽는데, 그 중 절반은 칼에 목이 잘려나갑니다. 심지어 주인공이 사람 창자를 밧줄 삼아 빌딩 창문을 통해 탈출하는, 참 설명하기조차 뭣한 엽기적인 장면도 있습니다. 어떤 관객은 '최근 10년간 본 영화 중 최악'이라며 거품을 물었고 '한 마디로 쓰레기'라는 인터넷평도 떴습니다.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동시에 무시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이 영화에 상당수 팬들이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내에서도 '오감(五感)을 만족시키는 영화'라는 식의 극찬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평론가는 .'터무니 없고, 제 정신 아닌 영화지만 매우 재미있다'며 거의 만점을 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마셰티'에 대한 이런 극찬에는 동의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화가 '쓰레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독특한 상상력과 새로운 감각을 만나는 게 영화 보는 재미의 핵심이라면, 이런 영화엔 분명 다른 영화에 없는 재미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재미일까요. 'B급 영화'(B movie)'의 맛입니다. 허무맹랑하고 유치하고 황당한데, 알 수 없는 우스꽝스러움이 우리를 '심심하지 않게' 합니다. '마셰티'에는 B급 영화, 싸구려 영화의 특징이 처음부터 끝까지 철철 넘칩니다.
캐릭터와 스토리 전개에서부터 황당한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인 마셰티(대니 트레조)는 멕시코의 전직 연방수사관이라는데, 외모의 어디를 보아도 연방 요원 비슷한 구석도 없습니다. 온 몸을 채운 문신들을 보면 영락없는 3류 범죄자일 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단 한가지의 험상궂은 표정밖에 짓지 못합니다.)
그는 마약 밀매업자 토레스(스티븐 시걸)에게 가족을 잃고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으로 오프닝에 나오는데, 영화가 시작되면 이번엔 그가 미국 정치인 암살에 나섰다가 함정에 빠집니다. 전개가 지그재그로 매끄럽지가 않습니다. ‘B급 영화’만의 맛을 살리려고 일부러 유치하게 찍은 것이죠.
그러니 ‘마셰티’에서 애시당초 스토리 따위를 이해하려고 두뇌를 사용할 필요는 별로 없습니다. 두 눈과 귀를 열심히 쓰면서 다른 영화에서 좀처럼 맛보기 힘든 기발한 상상력을 맛보면 되는 것입니다. 난도질 유혈 장면이 많이 있지만, 묘하게도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장면마다 서린 독특한 유머 코드 때문에 낄낄 웃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인마살상용’이라기보다는 정글에서 야자수 가지 치는데 쓰면 딱일 것같은 큰 칼을 주인공이 주무기로 쓰는 것부터가 우스꽝스럽지만, 그 수많은 총 가진 자들이 칼 하나를 당하지 못하는 것은 더 웃깁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난도질에서 마셰티는 칼은 물론이고, 와인 오프너, 가지치기용 전정가위, 목공용 못총, 수술도구등 온갖 생활용품들을 기발하게 이용(?)합니다. ‘킬 힐’(kill heel)로 불리는 길다란 뾰족굽으로 악당을 진짜로 ‘킬’하는 대목이 그 기발함의 절정인 듯합니다. “신은 자비를 베풀지만, 나는 아니야” “내가 왜 인간이 돼야 하지? 이미 신화인데” 같은 B급 정서 충만한 대사를 들으면 더 낄낄대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B급이 아닌 것은 출연진입니다. 명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부패한 정치인, 액션영웅 스티븐 시걸이 유례없는 악역을 맡습니다. 제시카 알바, 린제이 로한 등 특급 미녀스타들이 조연으로 나올뿐 아니라 좀처럼 못보던 올 누드 장면 (물론 대역을 썼느니 논란이 많지만)까지 보여줍니다. ‘폭력'과 ’섹스'라는 B급 영화의 양대 요소에 충실한 셈이죠.
‘마셰티'를 보는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 자신도 모르게 실실 배어나오는 웃음입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웃는다는 자체가 당황스러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일반적 웃음은 아닙니다. 기타노 다케시의 검객영화 ‘자토이치'에서 너무 비장하게 장검을 뽑으려다 옆 사람을 베는 장면을 보면서 터져 나왔던 웃음과 닮았습니다. 기타노 다케시는 10여년 전 인터뷰에서 “웃음은 때론 잔인한 것. 사람이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머리를 다칠때도 구경꾼은 웃지 않는가. 이게 웃음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누구는 B급 영화를 불량식품 같다고 했습니다만, 나는 떡볶이 튀김 순대 같은 ’거리음식‘이라고 비유하고 싶습니다. 분명 싸구려인데 때론 고급 레스토랑 음식(메이저 영화)보다도 더 구미가 당긴다는 점이 닯았습니다. 떡볶이를 대기업이 인스턴트화하여 대량생산하는 것도, B급영화 쪽 천재들이 메이저 영화사에 발탁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B급영화‘들은 절대로 다수가 좋아할 영화는 아니지만 어차피 ‘19금'으로 개봉되는 이상, 이런 취향의 사람들끼리 이런 정도의 영화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비위가 약한 분들은 안 보시는게 낫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