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의 바둑에 대한 열정은 못 말릴 정도예요. 대회 때면 200명도 넘는 참가자가 유럽 도처에서 몰려들어 개최지 참가자 집에서 밤을 지새우며 바둑을 둡니다. 그토록 흥겨운 축제가 없어요." 독일 함부르크를 거점으로 유럽에서 5년째 한국 바둑을 심고 있는 윤영선(34) 八단이 최근 일시 귀국했다. 여류국수 3연패(連覇) 등 여성 바둑계를 휩쓸던 그는 2006년 독일 남성과 결혼 후 한국을 떠났다.
현재 유럽에선 중국 출신 궈주엔(郭鵑), 일본 유학을 거친 루마니아인 타라누 등 4~5명의 프로가 활동 중이지만 윤영선의 인기가 단연 최고다.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있기 때문. 개인과 클럽 사범 역할 외에 주말마다 각국을 돌며 세미나를 여는 한편 인터넷 강좌도 시작했다. 지난주엔 네덜란드 대표팀 지도차 암스테르담에 다녀왔고, 한국 프로들의 대국보 해설집도 곧 나온다.
"처음 도착했을 때 바둑은 공짜로 배우는 걸로 알고 있더라고요. 일본이 보급을 위해 오랜 세월 무료 강습을 시행해 온 탓이죠." 윤 八단은 바둑에 대한 인식 전환 필요성과 함께 앞으로 해외 보급에 나설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잘못된 관습을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행사에 초대받으면 보수를 제시했고, 응하지 않으면 안 갔다.
강의가 열정적이고 알차다는 평판이 돌면서 윤영선은 비로소 '유급(有給) 프로페셔널'로 안착했다. "하지만 동·서양 문화의 차이엔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돼요." 눈앞에서 지갑을 열어 때론 동전까지 섞인 사범료를 건네는 수강생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 "한달 평균 수입은 우리 돈으로 250만원쯤 될까…프로세계의 참모습을 깨닫게 해준 걸로 만족해요."
독일어 강의엔 웬만큼 이력이 붙었는데 문제는 바둑 용어(用語)다. 워낙 오랜 세월 일본말로 굳어진 탓에 한국 용어를 심으려는 시도가 자주 벽에 부딪친다. 그런 와중에도 수강생들이 행마(行馬), 패(覇), 정석(定石), 단수(單手) 등 우리 말 발음으로 표현할 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윤 八단에 의하면 유럽 바둑 팬의 약 80%가 컴퓨터 종사자, 수학자, 프로그래머들이다. 연령별로는 30대 중반에서 50대까지가 많고 10대 비율이 낮다. 그는 "아이들의 지능 개발과 성격 형성에 바둑만한 게 없다"며 유럽 꼬마들을 위해서나 해외 바둑 보급 차원에서나 어린이 바둑 육성이 최대 과제라고 분석했다.
유럽은 6월 11일부터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제3회 '기도(Kido)컵' 대회를 앞두고 한창 들떠 있다. "일본과 중국 스폰서 틈에서 처음으로 한국 기업(기도산업)이 나선 대회거든요. 상금 규모가 가장 커 유럽 바둑 팬들이 총집결하지요." 조혜연 九단 등 한국 프로 3~4명도 이번 대회에 초청키로 했다.
5살 연하의 남편 라스무스 부흐만씨는 대학 수학과 조교로 일하며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아마 3단인 그는 아내가 지도 대국을 안 해주는 게 늘 불만이다. "요리사가 자기 집에서 요리하던가요? 집에서까지 바둑돌을 잡을 순 없죠." 대신 매운 한국 음식 마니아인 남편을 위해 '불닭'을 종종 만들어준다.
"아시안게임 때 중국을 꺾고 우승한 후배들이 너무 대견해요." 지난 시절이 종종 그리워지긴 하지만 되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했다. 지독한 승부 스트레스에 다시 시달리고 싶지는 않다는 것. "새로 택한 길도 충분히 즐겁고 보람 있다"는 윤영선은 24일 독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