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보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영화라는 친밀한 장르를 통해 그림 읽는 훈련을 해 보는 것도 좋다. 이 방법은 도슨트(미술관 안내인)의 천편일률적인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훨씬 낫고, 영화의 해석을 통해 그림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새기도록 해 준다.

빈센트 반 고흐의‘귀를 자른 자화상’과 영화‘열정의 랩소디’에서 반 고흐 역을 맡은 커크 더글러스.

그림을 소재로 하는 영화에는 화가들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傳記) 영화가 압도적이다.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많은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열정의 랩소디'(1956), '빈센트'(1990) 등이다. 빈센트 미넬리와 조지 큐커가 공동감독한 '열정의 랩소디'는 파리의 생활고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예술혼을 펼쳤던 반 고흐(커크 더글라스)의 아를 시대를 담고 있다. 친구 고갱(안소니 퀸)과 함께 황금빛 들판과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한 그는 대표작 '반 고흐의 침실'과 '해바라기', '밤의 카페 테라스'등을 완성한다. 영화에는 야외 스케치를 나갔다 폭풍우를 만난 반 고흐와 고갱이 허겁지겁 화구를 챙겨 돌아오는 장면,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장면 등이 나온다.

알렉산더 코다 감독의 1936년작 '렘브란트'(찰스 로튼 주연)는 명암의 대비로 신비로운 화면을 구사한 렘브란트의 화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영화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야경'(2007)과 '렘브란트의 심판'(2008)도 렘브란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세세히 짚어준다.

영화 '야경(夜警·Nightwatching)'에선 거만하면서도 솔직한 렘브란트(마틴 프리먼)가 아내를 여읜 슬픔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민병대 본부의 벽을 장식할 집단초상화 '야경'을 주문받는다. 이 영화는 렘브란트가 '야경'을 그리면서 접하게 된 암스테르담 황금기의 권력과 부(富)에 얽힌 추악한 음모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 속 렘브란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의 자화상처럼 천천히 늙어간다.

르누아르의‘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와 영화‘아멜리에’의 한 장면.

장-피에르 주네 감독의 '아멜리에'의 주인공 아멜리에(오드리 토투)는 매일 아래층에 사는 화가 듀파엘(세르지 멜린)이 르누아르의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를 모사하는 것을 지켜본다. 듀파엘은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 중, 화면 중앙 후면에서 물잔을 들고 있는 여자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해 그 그림을 완벽하게 모사할 수 없었다. 르누아르는 센 강가의 프루네즈 레스토랑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선이 아닌 색으로 형태를 만들었던 르누아르가 자연의 빛을 충실하게 그려낸 이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이다. 특히 그림 속 강아지를 어르고 있는 여성은 양재사로 일하던 알린 샤르고로, 후에 르누아르의 부인이 된다.

살바도르 달리는 84세로 세상을 뜨기 직전 스페인의 시인 로르카와 우정을 넘는 사랑을 나눈 사이였다는 사실을 처음 밝힌다. 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폴 모리슨 감독의 '리틀 애쉬'로 제작된다. 이 영화는 범상치 않았던 달리(로버트 패틴슨)의 청년 시절과 함께 그의 친구인 로르카(자비에 벨트란)의 삶도 비중 있게 다룬다. 영화는 18세의 달리가 마드리드 왕립학교에서 로르카를 만나 예술과 사랑을 논하는 모습을 격정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물속 장면은 신선하면서도 초현실적으로 묘사된다. 영화의 제목이자 달리가 1927년 그린 그림의 제목이기도 한 '리틀 애쉬'의 푸른 빛 속을 떠도는 유기물은 고뇌하는 청춘들의 우울함의 실체이자 허상으로 그림 속 이미지를 영화로 재현한 셈이다.

영화 '노팅힐'에서는 한 점의 그림이 남녀 주인공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샤갈의 '결혼'(1950)이다. '신부'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그림은 갈등을 딛고 다시 만난 안나(줄리아 로버츠)가 윌리엄(휴 그랜트)의 집에 와서 차를 마시는 장면에서 찻잔을 든 안나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 그림의 제목만 보아도 영화의 해피엔딩을 점칠 수 있다.

샤갈의‘결혼’과 영화‘노팅힐’의 한 장면.

교양 있고 수준 있는 그림도둑이 등장하는 영화로는 존 맥티어난이 감독한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가 있다. 품위 있고 부자인 토마스 크라운(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그림도둑과 훔쳐간 그림의 뒤를 쫓는 보험회사의 여성 직원 간의 두뇌싸움에 이어 사랑싸움이 영화의 재미를 배가한다. 영화는 1968년 스티브 매퀸과 페이 더너웨이가 주연한 같은 이름의 원작을 발전시킨 것이다. 동양의 그림 도둑 이야기로는 멋진 두 사내 주윤발과 장국영이 출연했던 '종횡사해'가 있다. 그림 전문털이범들의 이야기인 이 영화에선 남자들의 우정과 의리, 형제애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적 사랑이 짠하게 화면을 적신다. 일본 오하라 미술관에 소장된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느의 초상'이 도둑질당한 작품으로 나오는데, 이 때문에 미술관의 항의를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모딜리아니의 우울한 그림은 홍콩 느와르의 축축함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림을 주제나 소재로 다룬 영화는 이렇듯 다양하지만, 아직 그 어디서도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가 있다. 그림으로 비자금 만드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