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C'est si bon)! 프랑스 말로 '아주 좋다'라는 뜻으로 60~70년대 서울 명동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감상실 이름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샹송 가수 이브 몽탕(Yves Montant)이 부른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C'est si bon de partir n'importe o? bras dessus bras dessous en chantants des chansons (팔짱을 끼고 노래를 부르며 어디로든 떠나는 건 정말 좋아)…."
대충 가사를 번역하자면 이런 뜻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봄날 얼떨결에 꽃구경을 떠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맘과 비슷하지 않을까.
작년인가 모 TV 방송국의 추석 특집으로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조영남 등 예전 세시봉 멤버들을 모아 출연시킨 프로그램이 널리 히트를 치더니 연초부터 전국 순회 세시봉 콘서트 열풍이 불 정도다. 지난달인가 대구에서도 세시봉 콘서트가 열렸는데 입장권 값이 세계적 클래식 연주가의 콘서트 못지않게 나가 보였지만 일찌감치 매진됐단 얘길 들었다. 세시봉 콘서트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40~50대 기성세대들로 경제적인 여력은 있지만 추억과 노래를 공감할 수 있는 문화적인 무대가 우리 사회에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란다.
세시봉 콘서트를 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클래식 음악감상실 '녹향(綠鄕)'이 떠올랐다. 녹향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이창수옹이 평소 보관하고 있던 음반 400여장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이옹은 독립된 공간에서 마음껏 음악을 듣고 싶어 감상실을 열었다고 회고했다. 녹향은 특히 6·25전쟁이 일어난 후 서울에 있던 많은 예술가들이 대구로 피란 와 쉼터로 삼으면서 명소가 되었다. 양주동, 유치환, 이중섭, 최정희, 양명문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화가들이 즐겨 찾았다. 당시 녹향을 자주 들리던 사람들 중에서 이중섭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그림을 한 장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이옹은 회고하면서 오늘날 이중섭이 이렇게 유명해질 줄 알았으면 그 그림들을 모아둘 걸 그랬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겨울이면 베이스 가수들의 애창곡으로 듣게 되는 가곡 '명태'가 만들어진 곳 역시 녹향이다. 양명문의 시를 보고 애주가였던 작곡가 변훈이 곡을 붙였다고 한다.
녹향이 처음 문을 연 곳은 중구 향촌동이었으나 80년대 초 지금의 자리인 화전동으로 옮겼다. 밖에서 보면 쉽게 찾을 수도 없을 만큼 낡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건물 2층에 자리한 녹향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 과거에 서 있는 듯하다.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출입문, 2009년부터 시작된 '녹향 되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새로 교체되긴 했지만 약간은 촌스러운 듯한 소파, 겉표지가 너덜너덜해진 LP판과 레이저 디스크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고풍스러운 축음기와 나팔모양의 커다란 스피커들이 60여년이 지난 녹향의 나이를 실감케 해준다.
세시봉에서 듣던 젊은 날의 노래를 다시 듣고 싶은 날도 있지만 비발디, 베토벤의 봄의 음악을 듣고 싶은 때도 있다. 세시봉 콘서트를 찾는 만큼 녹향의 존재와 역사도 지켜나갈 수 있는 우리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싶다.
입력 2011.04.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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