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영어권 국가가 아니지만 영어 이니셜이 호칭을 대신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영어 이니셜은 이름이나 성씨의 첫소리를 따는 단순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 글자 수에 따라 사용방법에 암묵적인 등급이 있다. JYP, SM기획처럼 자기 이름의 이니셜을 회사명으로 쓴 것은 개인의 영향력과 가치를 극대화한 경우다. YS·DJ·MB처럼 유명 정치인들의 두 글자 이름 이니셜은 언론에서 글자 수를 줄여주는 기능적인 면 외에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영어 이니셜이 한 글자로 줄어들면, 그 의미는 확연히 달라져 익명(匿名)으로 통한다. 물론 표면적인 의도는 실명(實名)을 숨김으로써 대상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K씨·L 의원 하는 식으로 성씨를 약간 모호하게 한 이니셜이 있는가 하면, A양·B군·C씨처럼 실명과 전혀 상관없는 알파벳으로 익명성의 강도를 좀 더 높인 경우가 있다. 이런 한 글자의 이니셜은 정치인과 연예인의 추문이나 일반인의 바람직하지 못한 사생활 보도에 자주 쓰인다.
하지만 한 글자 영어 이니셜은 그렇게 불린 것 자체로 요란한 고발이며, 각종 수식어와 정황이 등장하니 누구인지 밝혀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유명 걸 그룹의 K양' '수도권의 H 의원' '국내 금융회사 대표 K 회장' 같은 세밀한 표현 속에 익명성은 허울만 남는다. 요즘엔 네티즌 수사대가 떠서 실명을 밝혀놓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니셜 기사가 실명으로 바뀌기도 한다. 즉, 대체로 이니셜은 추문(醜聞) 당사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작성자의 책임 모면 수단이다. 그 때문에 억울한 사람도 생긴다. 한 국회의원은 자신이 문제가 된 '경기도 출신 L 의원'이 아니라고 해명했고, 또 다른 의원은 문제 된 '수도권 국회의원'의 연고지가 서울인지 경기도인지 분명히 하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나는 이니셜이 쓰인 기사를 읽을 때면 늘 마음이 편치 않다. 익명을 써서 그런지 더 노골적이고 수위 높은 표현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명 걸 그룹의 K양, 막장 과거 밝혀졌다" "지금은 군대에 간 톱스타 B씨는 잡지에 집을 공개한다는 조건으로 건축가,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까지 끼고 아예 새집을 지었다" "갑작스레 브라운관에 나타난 신예 R양, 알고 보니 스폰서 G씨가 있었다" 등의 기사를 읽다 보면 저절로 '대체 누굴까?' 하고 궁금증이 생기는데, 그러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문제는 이니셜을 쓴 대부분의 기사가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써야 흥미를 끌 수 있다는 작성자의 저급한 믿음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명백한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반드시 알려야 할 것이라면 실명을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다. 사실관계가 완벽하지 못하다면 이니셜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아예 그 기사나 글을 쓰지 말아야 옳다.
최근 신정아씨의 회고담이 실명과 이니셜을 나란히 등장시켜 화제를 모았다. 폭로의 의도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쏟아지고 있지만, 실명을 쓴 것은 사실 여부에 대해 본인이 책임지겠다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실명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화살이 될 수 있으나 화살을 쏜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니셜은 무책임하게 남발하는 독침(毒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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