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판사 출신인 A 변호사는 2008년 항소심에서 패소한 민사사건의 상고심(上告審) 변호를 맡았다. 의뢰인은 상고이유서 작성을 A 변호사에게 맡기면서 "변호인 명단에 대법관 출신 변호사 이름을 꼭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착수금으로 5000만원 줄 테니 2000만원은 당신이 갖고 3000만원은 대법관 출신 변호사에게 지급하라"고 금액까지 정했다는 것이다.
A 변호사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찾아가 선임계와 상고이유서에 도장만 받아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러나 사건은 심리불속행(본안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것)으로 기각됐다. 의뢰인은 돈을 돌려달라고 협박했다. A 변호사는 한참 선배인 대법관 출신 변호사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의뢰인에게 5000만원을 돌려주고 말았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상고 사건 '도장 값'으로 거액을 받는다"는 법조계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지난해 2심 판결이 잘못돼 파기환송해야 할 사건이 있었는데, 피고 측에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끼더니 심리불속행 처리돼 원심대로 확정된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대법원이 급증하는 상고 사건 처리의 부담을 덜기 위해 1994년 도입한 '심리불속행 제도'에 대한 법조계 안팎의 비판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대법원에 상고한 민사 사건은 1만635건이었으나 무려 64.9%인 6898건이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됐다. 심리불속행 기각률은 2006년 58.6%에서 7.3%포인트나 급증했다. 대법원에 접수되는 상고 사건 3건 중 2건은 대법관 심리도 받지 못하고 기각되는 셈이다.
2009년 국정감사에선 퇴직한 한 대법관이 맡은 대법원 사건은 한 건도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2006년 국감 때는 1990년 이후 퇴임한 대법관 출신 변호사 13명이 선임한 사건의 심리불속행 기각률이 6.6%밖에 안 됐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일반 상고 사건은 65%가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되는데도 전직 대법관이 선임되면 거의 기각되지 않고 대법관 심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당사자들은 퇴임 대법관 이름을 변호인 명단에 올려야 심리불속행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게 돼 비싼 수임료를 내가며 전직 대법관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법조계 인사들은 말한다. 법조계에선 "전관예우의 핵심이 대법원의 '전직 대법관 예우'"라는 말까지 돌고 있다. 대법관을 지내고 작년 8월 퇴임한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대법관 퇴임 후 '로펌에 가면 1년에 100억원까지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언급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판사 출신의 중견 변호사는 "3심제하에서 국민들은 마지막 판결을 받기 위해 상고하는 것인데 상고 대상이 안 된다고 기각해버리는 건 사법 서비스 차원에서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대법원은 "대법원이 법률심 기능을 높이고 정책법원으로 가기 위해선 일정 정도 상고 사건을 제한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법조계 인사들은 하급심 판결에 불만이 많은 상황에서 심리불속행으로 대법원 판단까지 제한하면 판결에 대한 불만이 더 쌓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조용식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부회장은 "대법원 재판이 충실하게 되려면 대법관 수를 어느 정도 늘리면서 장기적으로 심리불속행 제도를 폐지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 심리불속행(審理不續行)
상고사건 가운데 상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사건은 더 심리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 심리불속행 처리되면 선고 없이 간단한 기각 사유를 적은 판결문만 당사자에게 송달한다. 형사사건은 심리불속행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