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색깔을 입힌 글 세 개가 떴다. www.○○○.com 사이트를 열었을 때다. '신규 가입한 회원님께 충전 신청액의 10% 보너스!' '오늘의 승패 맞추기 스페인 디비전2 라요 바예카노 vs 레알 베티스' '장애시 ◇로 접속하세요.'
이 불법 스포츠베팅 사이트의 '간판 종목'은 축구인 듯 했다. 브라질·아르헨티나·스페인·영국 같은 강호(强豪)뿐 아니라 별의별 나라에 다 돈을 걸 수 있도록 해놨다. 그리스· 싱가포르·온두라스·폴란드에 베트남까지 있었다. 베팅 할 수 있는 종목도 다양했다. 농구·야구·배구·아이스하키·미식축구·핸드볼에 최소 5000원, 최대 100만원을 걸 수 있다. 스코어를 정확히 맞추면 300만원을 가져갈 수 있다. 게시판에 들어가보니 글이 4000개나 올라와 있었다.
들어가 본 사이트들은 외양만 달랐을 뿐 다 비슷했다. 개중엔 며칠 전까지 멀쩡하게 운영되다 접속이 끊긴 사이트도 있었다. 스포츠토토측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려는 수법"이라며 "돈 챙기고 튀는 '게릴라식'"이라고 말했다.
■2006년 3월 '바다이야기'
2000년은 우리나라 온라인 게임산업사(史)에서 중요한 해다. 그해 3조879억원이던 시장 규모가 올해 6조5086억원으로 늘어났다. 이런 활황세가 한 게임의 등장으로 일거에 꺾여버렸다. 2006년 일어난 '바다이야기'사태였다.
'바다이야기'는 일본의 '우미노모노가타리(海の物語)'시리즈가 원조다. 이걸 한 한국 회사가 우리 식으로 둔갑시켰다. 화면에서 회전하는 그림을 일치시키면 점수를 받고 일정 점수가 되면 인형이나 상품권 같은 경품을 주는 것이다.
2004년 개발된 '바다이야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2년 만에 게임기가 4만5000대나 팔렸다. 성공의 배경은 게임이 흥행성 때문만이 아니었다. 상품권이 암암리에 현금으로 바뀌면서 '게임'이 아닌 '도박'으로 변질된 것이다.
'바다이야기'는 일본을 초토화시킨 지진해일처럼 도농(都農)을 초토화시켰다. 재산을 날린 피해자가 100만명, 피해액이 10조~20조원으로 추산됐다. 이걸 감시해야 할 게임물등급위원회 일부 조사관의 비리에 정치인 연루설까지 퍼졌다.
대대적인 단속에 게임개발사 대표가 2007년 구속되면서 이 사태는 끝난 듯 했다. 그런데 여파가 엉뚱한 데서 나타났다. '풍선효과' 한곳을 누르면 다른 곳이 불룩해지듯 불법 스포츠베팅을 비롯한 온라인 도박이 급성장한 것이다.
■의문의 돈 뭉치, 비밀의 문을 열다
비밀의 문(門)은 예상치 못하게 열린다. 지난달 12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날 '스포츠토토'에 비상이 걸렸다. "서울 여의도백화점 10층 보관창고에서 나온 현금 10억원이 스포츠토토 괴(怪)자금 아니냐"는 문의가 폭주한 것이다.
그 사흘 전인 2월 9일 보관창고측은 짐을 총정리하고 있었다. 경기도 여주로 이사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임자 모를 박스 세 개가 나왔다. 알아보니 작년 8월25일 누군가 1년치 보관료 201만9600원을 현금으로 냈다는 것이다.
CCTV를 조회해보니 짐 위탁자는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그는 그 넉 달 뒤 한 번 나타나 박스 세 개 가운데 하나를 찾아갔다.
업체 직원 양모씨는 "폭발물 같은 상자 두개가 있다"고 신고했다. 경찰특공대 폭발물 제거반이 동원돼 가로 36㎝, 세로 30㎝, 높이 25㎝크기의 상자를 뜯었다. 안엔 각각 8억원과 2억원이 있었다. 모두가 5만원권과 1만원권이었다. 이 돈은 '스포츠토토'를 본딴 불법 스포츠베팅사이트 '벳탑' 운영진의 것이었다. 경찰 수사 결과 놀라운 일들이 드러났다. '벳탑'은 사이트를 개설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23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전체 매출액은 199억원이나 됐다.
■6개월 만에 199억원
이 엉성해 보이는 이 사이트에 이런 거액이 몰린 이유는 뭘까? 바로 여기서 2006년 나라를 뒤흔든 '바다이야기'와의 접점(接點)이 나온다. '바다이야기'사태 후 정부는 게임산업 규제를 강화했다. 그 가운데 '스포츠토토'가 있었다. '스포츠토토'에 가해진 규제는 강력한 것이었다. 제일 대표적인 사례가 판매점에서 10분당 발매할 수 있는 금액 한도를 계속 낮춘 것이다. 애초 200만원에서 150만원(2007년 9월)→100만원(2008년 8월)으로 줄어든 것이다.
특정 게임, 특정 조합에 베팅액이 일정 기준을 넘기면 더 발매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 액수도 10억원에서 재작년 4월 5억원으로 축소됐다.
'벳탑'은 1인당 베팅 상한액이 스포츠토토(10만원)보다 10배 많은 100만원이다. 환급률도 스포츠토토(60%)보다 20~30% 높고 규제가 없다. 어떤 사이트는 베팅 상한액이 천만원대다. '불나방'들이 모일 조건을 다 갖춘 셈인데 문제는 이런 사이트가 '벳탑'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경찰이 2008년 5월부터 2년간 적발한 불법 스포츠베팅 사이트는 21개다. 매출 총액은 1243억원이다. 이들 이름에선 척 봐도 '짝퉁'티가 난다. 천사토토(1004toto)·비윈(bwin)·키스토토(kiss-toto)·비비큐(bbq)·베스트벳(bestbet)으로 운영자가 37명인 '비윈'이 제일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