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수월관음도, 고려청자, 조선백자, 대동여지도 사본, 칠기 자개함, 조선시대 8폭 병풍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19세기 말 화가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독일 박물관 창고들에서 잠자던 한국의 진귀한 유물들이 일반에 공개된다. 국제교류재단 베를린사무소(소장 민영준)가 온갖 곡절 끝에 독일 10개 박물관 수장고를 뒤져 찾아낸 6000여 점의 한국 유물 중 116점을 골라 25일부터 2013년 2월17일까지 독일 4개 도시에서 특별 순회전(‘한국의 재발견-독일 박물관 소장 한국의 보물’)을 갖는다.
유물 대부분은 1900년대 독일의 외교관, 선교사, 사업가 등이 한국에서 구입해 가져갔던 것들로, 대표작인 고려 수월관음도는 쾰른 동아시아 박물관 설립자인 아돌프 피셔가 1910년 한국에서 일본인 예술품 중개상으로부터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처가 쓰고 있는 천이 투명하게 묘사돼 있어 고려 불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18세기 조선백자 컬렉션은 독일인 무역상들의 손을 통해 독일로 넘어 갔다. 5~6세기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귀걸이, 1794년 제작된 조선시대 8폭 병풍, 19세기 말 동경제국대 교수를 지낸 칼 코트셰가 1884년 조선 여행길에 사들인 대동여지도 사본 등도 함께 전시된다.
'시간을 거슬러 가는 여행'이라는 주제의 이번 전시회는 오는 7월17일까지 쾰른 동아시아 미술관에서 진행되며, 2012년 2월16일부터 5월27일까지는 라이프치히 그라치 민속 박물관, 6월28일부터 9월9일까지는 프랑크푸르트 응용미술 박물관, 2012년 11월17일부터 2013년 2월17일까지는 슈투트가르트 린덴 박물관에서 열린다.
유럽에서의 한국유물 전시회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1980년대 이후 유럽 전시는 2008년 벨기에 브뤼셀의 불교미술전까지 6건에 불과했다. 독일에서는 한국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으로 선정된 2005년 베를린에서 열린 고구려 고분벽화전이 끝이었다.
이번 전시회는 한국 유물을 갖고 있는 독일 내 10개 박물관이 모두 참여해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국제교류재단 베를린사무소 민영준 소장(51)은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나, 한국 유물에 대한 이해 부족, 전문가 부재 등으로 유물 대부분이 수장고에 잠자고 있었다”면서 “2년여의 노력과 설득 끝에 10개 박물관 모두가 참여하는 행사를 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2009년 논의를 시작해 20개월의 준비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민 소장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독일 소장 한국유물에 관한 400여 쪽의 도록을 영어·독일어로 발행하게 된 것도 큰 보람”이라면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대한 독일인들의 관심, 독일 내 한국의 위상 제고 등도 전시회 성사에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민 소장은 2008년 3월 베를린에 부임한 뒤 독일 박물관들의 한국 유물 전시가 너무 초라한 데 충격을 받고,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게 됐다. 독일 박물관 중 한국실이 있는 곳은 딱 두 군데, 쾰른 동아시아박물관과 마인츠의 구텐베르크 인쇄박물관 뿐이었다.
쾰른 동아시아박물관의 한국실은 1995년 국제교류재단의 지원으로 생겼는데, 2009년 2월에 가 보니 한국실 간판을 떼고, 중국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라이프치히 그라씨인류학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비참할 정도로 초라했다. 북한 전시대에 뱀술과 고무신, 남한 전시대에 비녀, 노리개, 칼 정도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10개 박물관을 설득해 한국 유물들을 찾아내고, 전시할 유물과 일정을 조정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2009년 8월 박물관 관장과 큐레이터들을 베를린으로 초청해 한국 유물 순회전을 공동 개최하자고 했으나, 소장품 목록이 없어 무엇을 갖고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당장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유물들 현황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현재 해외 박물관 중 한국실이 있거나 한국 코너를 운영하는 곳은 22개국 60여개에 불과하다. 상당수는 전시 품목들이 초라해 존폐 위기론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