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석 오아시스레코드 대표

1968년 여름. 서울 장충동 오아시스레코드 스튜디오. 당시 최고 음반사이던 이 회사 손진석 대표는 속이 탔다. 녹음시간에 가수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가수가 꿈"이라며 부산에서 올라와 온갖 잡일을 도맡던 21세 사환 최홍기의 투박한 얼굴에 눈길이 갔다. "에라이, 홍기야, 이 노래 너나 한번 해봐라." 청년은 일생일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절박했던 탓인가, 한층 구성진 노래가 나왔고, 손 사장은 입을 떡 벌리며 경탄했다. 그는 주저 없이 이 청년과 계약을 맺고 바로 데뷔 음반을 제작했다. 예명도 지어줬다. 나훈아. 손 사장은 3년 전 역시 "가수가 꿈"이라며 찾아온 19세 청년 남진(본명 김남진)의 재능도 바로 알아보고 데뷔시킨 특별한 안목의 소유자였다. 남진·나훈아는 이후 수십년 한국 가요계를 휘어잡은 전설적 스타가 됐다.

1960~80년대 신인 발굴의 귀재로 통했던 가요계 거목인 오아시스레코드사 손진석(83·孫晋奭) 대표가 13일 오전 9시 40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유족들은 "열흘쯤 전에 가슴이 답답하다며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며 "조금 좋아지는 것 같아 일반 병실로 옮겼는데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경기도 안양의 오아시스레코드는 1960~70년대 지구레코드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 음반사였다. 신생 회사들의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80년대까지도 여전히 대형 음반사로 통했고, 사세(社勢)는 많이 위축됐지만 요즘도 여전히 음반을 낸다.

서울사대 영문과 출신으로 학생회장까지 맡았던 고인은 졸업 후 무역회사를 운영하다가 1958년 오아시스레코드를 인수해 음반업계에 뛰어들었다. 이후 수많은 히트 음반을 제작하며 '가요계 큰손'으로 통했다. 총 2500여종의 국내 음반과 1500여종의 해외 라이선스 음반을 만들었다. 타계 직전까지도 현업에서 뛰며 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려 노력했다.

1980년 9월 오아시스 손진석 대표가 가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고 있다.

그는 주로 트로트 가수의 음반을 냈지만 여러 장르에 관심이 많았다. 나훈아·남진을 비롯, 조미미·이수미·방지연·김세레나·송대관·이용복·조영남·김상희·펄시스터즈 등을 전속 가수로 데리고 있었다. 남진은 "정이 많고 자상하셨던 분으로 가수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며 "무엇보다 대중이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난 분"이라고 했다. 송대관은 "가능성 있는 신인을 보면 과감하게 투자하신 분"이라고 했다. 무려 3000여곡을 만들며 '국민 작곡가'로 통하는 김희갑을 발굴한 것도 그였다. 악단을 이끌며 유명 가수 음반의 편곡과 녹음에 참여하던 김희갑의 재능을 알아보고 수시로 술을 사며 작곡을 부탁, 결국 1967년 오아시스에서 첫 앨범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80년대에는 '잃어버린 30년'이 수록된 설운도의 음반을 낸 뒤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수차례 출연시켜 또 한 명의 대형 트로트 스타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대중문화평론가 최규성씨는 "우리 대중음악의 질적·양적 팽창이 시작된 곳이 바로 오아시스레코드였다"고 했다. 빈소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15일 오전 7시. 유족은 아들 종무(재미)와 딸 소영(재미), 소라(재불)씨. (02)2227-7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