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연 교수

"아, 그땐 헤겔이 '해결'인 줄 알았지.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한계가 보이더군."

교수는 20년 전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한때 헤겔 전문가로 이름을 떨쳤던 동국대 황태연(56) 교수다. 그가 '공자와 세계'라는 제목의 방대한 저서를 냈다기에 21일 학교 5층 연구실로 찾아갔다.

그는 손꼽히는 유럽 좌파 이론가 중의 하나였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에서 마르크스를 재해석한 '지배와 노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저술과 강의를 했다. 세간에는 'DJ 브레인'으로 더 유명하다. 책에도 "DJP연합의 물꼬를 터 1997년 정권 교체에 기여했고,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1998~2003)…, 민주당연구소장(2008~9)을 역임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런 그가 공자를 들고 나왔다. 그것도 500쪽 안팎의 책이 5권. '공자의 지식철학(상중하)' '서양의 지식철학(상하)'. 원고지 1만장 분량이다. 이마저 전체 4부작 중 절반이다. 집필 중인 '공자의 덕치철학'과 '맹자의 혁명철학'이 나와야 완결된다.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둥성(山東겛) 취푸(曲阜)에 세워진 공자상(像). 이 곳 공자 묘와 사당, 고택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기도 하다.

왜 지금 여기서 공자인가? "오래전부터 동·서양을 아우르는 게 학자로서 의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이나 대학 때도 한문을 많이 했다. 유학 마치고 귀국해 동양 정치철학도 20년 가까이 가르치고 연구했다. 그동안 쌓인 것을 지금의 시대상과 결부시켜 대안을 제시해보려 했다."

사실 그의 동양학에 대한 관심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2003년 '사상체질과 리더십'을, 2005년 '공자의 주역관'을 썼다. 2008년에는 1000쪽이나 되는 '실증주역'도 펴냈다. 당시 주역을 유교적 신학(神學)에 비유하면서 동양문화의 밑그림을 알기 위해 필요한 학문이라고 했다. 그때도 서양의 이마누엘 칸트와 막스 베버를 들어 주역을 설명했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의 노작(勞作)을 '다이아몬드 세공'에 비유했다. "공자 철학을 원석으로 삼아 서양 철학의 다양한 관점에서 새롭게 절차탁마하고 광택을 냈다. 동아시아인과 세계인을 다시 한 번 덕스럽고 지혜롭게 만들 수 있는 새 공자철학을 재창조했다."

책에는 '파격적인' 대목이 적지 않다. 18세기 유럽 계몽주의가 공자·맹자 사상에서 발원했다는 입론은 적어도 일반인에게는 생소하다. "아담 스미스는 공맹 사상을 베껴 쓰면서 주를 안 달았다. 볼테르가 주창한 톨레랑스(관용)도 동양의 인(仁)에서 건너갔다." 그 결과 유럽은 동양 사상으로 전면적 혁신을 이뤄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이룰 수 있었다. 반면 동아시아는 그때까지 서양보다 우위에 있었음에도 닫힌 태도를 고집하다 역전됐다는 것. 그는 이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플라톤에서 푸코, 사마천에 이르는 숱한 동·서양 고전을 파헤쳐 각주에 열거했다. 그는 "한때 세계를 석권했던 서양의 합리주의는 이제 스스로 파탄을 선언했고 포스트모더니즘도 '철학적 개그'로 끝났다. 이제 역사의 사이클은 동아시아로 돌아오고 있다. 동아시아 유교문명권을 재건하는 길은 서구의 경험주의와 연대해 공맹철학을 재창조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공자는 중국이 요즘 '소프트파워'로 내미는 국가 브랜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황 교수는 "공자 사상은 공산당 지도 이념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면서 "한국은 유교 전통을 부정하지 않고 근대화를 달성했기 때문에 오히려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책날개 자기소개란에는 '민주화운동과 현실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적혀 있다. 그는 스스로 아직 진보적 입장이라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가급적 골고루 살 수 있도록 애쓰는 쪽이 진보다. 부의 불평등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하는 쪽은 보수다." 그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평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대의제나 민주 원칙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과거 군부 독재도 문제였지만 성난 대중의 독재도 우리 현재나 미래를 좀 더 복되게 하려면 방어해야 할 세력"이라는 것이다.

'정의론'으로 뜬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도 거론했다. "샌델의 책이 180만부 팔렸다고 하는데 서양 철학의 정의론으로는 불평등 문제에 해답을 내놓지 못해요. 결국 인(仁)사상에서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서양의 휴머니즘도 거기서 나온 거예요." 황 교수 역시 일반 대중을 겨냥해 이번 학기 자신의 공자 강의를 받아 적게 한 다음 별도 단행본으로 낼 생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