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로랜드(lowland) 고릴라인 ‘고리롱’이 고령으로 결국 눈을 감았다. 국제적인 멸종위기종이자 국내에 있는 단 두마리 중 한 마리였던 고리롱의 ‘별세’ 소식에 동물원은 슬픔에 잠겼다. 고리롱이 생활해온 서울동물원 측은 한 마리 가격이 10억원에 육박하는 이 희귀종의 2세를 얻기 위해 ‘짝짓기 동영상’까지 보여주던 터였다.
서울동물원은 “1963년생으로 추정되는 할아버지 고릴라 ‘고리롱’의 몸 상태가 지난 10일부터 급격히 악화됐었다”며 “링거를 통해 영양제까지 투여했지만 지난 17일 밤 8시 10분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21일 밝혔다.
그간 고리롱은 그야말로 ‘특급 대우’를 받았다. 10억원 이상을 준다고 해도 거래가 이뤄지지 않을만큼 로랜드 고릴라가 희귀종이었기에 동물원 측은 고리롱 2세 얻기 작전에 주력해왔다.
강남 차병원 비뇨기과의 박정원 교수팀은 작년 2월부터 고리롱 2세를 만들기 위해 ‘실버리본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할아버지 고리롱에게는 시알리스 등 ‘발기부전 치료제’를, 암컷 고리나에게는 배란 유도제를 우유에 섞어 먹였다. 고릴라의 짝짓기 본능을 불러일으키려 자연 상태에서 고릴라들이 짝짓기하는 비디오 영상을 보여준 것은 물론, 비뇨기과와 산부인과의 정기 검진까지 실시했다. 신방(新房)엔 천연잔디를 깔아주고, 사계절 야외에서 생활할 수 있는 야외 방사장엔 온돌 바위까지 갖춰줬다.
나이가 각각 40대와 30대인 고리롱과 고리나는 임신하기엔 고령이었지만, 동물원 측은 영국에서도 30대 수컷이 2세 만들기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희망을 걸고 있었다. 고리롱을 약 4년간 돌봐온 박현탁(36) 주무관은 고리롱에게 약을 탄 우유를 직접 먹이이는 등 애정을 쏟아왔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두 고릴라의 관계는 시간이 가도 데면데면했다. 문제는 '돌부처' 고리롱에 있었다. 박 주무관은 "가끔 암컷 고리나가 몸을 부비는 등 애정공세를 펴기도 했지만, 고리롱은 먼 산만 보곤 했다"고 말했다. 동물원 수의사들은 "고리롱을 부검한 결과, 노환으로 장기가 이미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다"고 전했다.
사람 나이로 치면 80~90세 정도였던 고리롱은 한국 동물원 역사의 한 획을 장식한 동물이다. 지난 1968년 아프리카에서 서울동물원의 전신인 창경원 동물원으로 이사 온 고리롱은 43년을 동물원에서 살았다. 다만 창경원의 열악한 우리시설 때문에 병을 얻어 발가락을 절단하는 바람에 기력은 늘 암컷 고리나에게 밀렸다. 야생 고릴라 세계에서는 짝짓기를 위해 수컷이 힘의 우위를 보여줘야 하는데, '힘 없는' 남편 고리롱은 결국 2세 낳기에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었다고 동물원 측은 설명했다.
고리롱의 마지막 죽음을 지켜본 사육사들은 "고리롱은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아주 강했다"고 했다. 바나나, 사과, 식빵, 당근, 닭백숙, 주먹밥 등 매일 10㎏에 이르는 식사를 했던 고리롱은 죽기 얼마전까지도 먹이를 곧잘 먹어치웠다. 사육사가 암컷 고리나에게 귤이나 사과를 던져주면 자신에게도 과일을 달라며 사람처럼 두발로 일어나 손을 '까닥까닥'하는 재주꾼이기도 했다.
동물원 측은 고리롱이 사망했어도 '인공수정'이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고리롱 생식기에서 고리롱의 정자가 남아있는 지 여부를 확인하고, 활동력이 있는 정자가 있으면 인공수정을 시도할 계획이다. 또 고리롱의 표피와 골격은 박제 처리를 한 뒤 6개월 후부터 일반에 공개할 방침이다.
서울동물원의 강형욱 홍보팀장은 "서울동물원은 평생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며 인기스타의 삶을 살았던 고리롱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한 달 동안 '고리롱 애도기간'을 갖기로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