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오즈의 소설 '여자를 안다는 것'에는 아내가 죽은 후 여자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남자가 나온다. 간질병을 앓는 사춘기 딸과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는 그는 자신이 한 번도 아내 혹은 여자에 대해 안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재미있는 점은 이 남자의 직업이 그 유명한 이스라엘 정보부대의 비밀 요원이었던 것. 세상 가장 풀기 어려운 암호가 가장 가까운 타인인 아내의 삶이라니. 이렇듯 더 이상 변수가 없어 보이는 중년 여인의 단순한 삶도 심층 연구에 들어가면 꽤 흥미롭다. 길 가는 평범한 아줌마도 알고 보면 이제는 비밀이 되어버린 뜨거운 청춘을 통과하신 놀라운 분이니까.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는 바로 이런 아내와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느라 과거를 묻어버린 중년 여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피파 리는 성공한 남편과 자식들, 멋진 집과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미국 교외 중산층의 우아하고 사려 깊은 매력을 보여주는 여성이다.
그러나 어느 날 몽유병을 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피파 리는 그동안 꽁꽁 얼려두었던 내면을 깨뜨리기 시작한다. 밤마다 일탈을 감행하는 불안한 모습이 진짜배기 그녀의 모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안정 그 자체이나 사실 피파 리는 왕년에 그야말로 '좀 놀아 본 언니'였던 것.
마약을 끼고 살던 젊고 불안한 여성이 출판계의 거물인 유부남을 만나 마샤 스튜어트 같은 모범 주부로 개과천선하기까지를 보여주며 영화는 중간 중간 진짜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다. 무엇이 여자의 삶을 채우고 있는가를 점검하며, 가장 중요한 요소인 어머니의 존재를 잊지 않는다. 모든 딸들의 딜레마인 "'엄마처럼 살기'는 싫지만 살다 보니 '엄마처럼 살기'도 쉽지는 않다"는 걸 피파 리도 경험한다.
마약 중독자인 엄마를 잊기 위해 마약에 빠져 살던 피파 리는 그 이후의 삶을 과거의 상처를 잊기 위한 노력으로 채워나간다. 다른 여자의 남편을 뺏었다는 죄책감에 더욱 완벽한 아내가 되려 했던 피파 리. 그러나 자신도 딸일 때 그러했듯이 종군기자인 딸도 그런 피파 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밀어내려고만 한다. 철없는 딸은 당연히 알지 못한다. 타인의 삶이란 아무리 별 볼일 없어 보여도, 내 삶이 그러하듯, 깊은 비밀과 상처를 덮으려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걸 말이다.
아마 그 딸도 엄마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매일 손톱이 자라듯 늙은 엄마의 삶도 더디기는 하나 매일매일 사랑하고 흔들리며 조금씩 자라난다는 것을 말이다.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 감독 레베카 밀러. 출연 로빈 라이트 펜, 키아누 리브스, 블레이크 라이블리, 모니카 벨루치. 2월 1일 개봉. 청소년 관람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