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일본인이기 전에 나는 축구인이다"
축구는 국가와 민족성이 진하다. 경계선에 있는 선수는 국적 선택을 놓고 갈등한다.
일본이 30일(한국시각) 카타르아시안컵에서 사상 처음으로 4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피날레의 주인공은 리 다다나리, 이충성(히로시마)이었다. 호주와의 결승전에서 연장 전반 8분 교체투입된 그는 연장 후반 4분 발리슛으로 결승골을 터트렸다. A매치 데뷔골이었다. 감격의 화살 세리머니를 하며 일본 축구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 애잔한 역사의 상처가 흘렀다. 그는 재일교포 4세다. 일장기를 달았지만 일본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국인도 아니다.
26세인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한국의 피가 흐른다. 과거는 이충성이었고, 현재는 '오야마 다다나리'다. 하지만 그의 유니폼에는 성인 'LEE'가 선명히 박혀있다.
증조부가 일본에 터전을 마련했다. 축구에 일찍 눈을 떴다. 실업팀 요코하마 트라이스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한 아버지(이철태)의 영향이 컸다. 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도쿄조선학교 5년때 3부 리그 요코가와무사시노FC 유스팀에 입단했다. 우연하게 기회가 왔다. 15세 이하 팀에서 FC도쿄와 경기를 하다 상대팀 사령탑인 시바타 게이 감독에게 눈에 띄었다. 2001년 도쿄도립 다나시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그는 FC도쿄 18세 이하 팀에 둥지를 텄다. 프로선수의 길이 열렸다. 당시 그는 동갑내기 오장은(울산)과 한솥밥을 먹었다.
성인이 되자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 한국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2004년 고국을 첫 경험했다. 청소년대표팀(20세 이하)을 이끌던 박성화 감독이 그를 발탁했다. 박주영(26·AS모나코) 신영록(24·제주) 백지훈(26·수원) 김진규(26·다롄) 등이 포진해 있었다.
공격수인 이충성은 박주영을 넘지 못했다. 상처도 받았다. 따뜻하고 포근해야할 조국은 그를 일본인으로 대우했다. "반쪽바리"라는 얘기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결국 적응에 실패해 대표팀에서 탈락했다. 태극마크를 다는 꿈을 버렸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축구만을 위해 뛰겠다고 다짐했다. FC도쿄에서 프로에 데뷔한 그는 2005년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해 주전을 꿰찼다. 당시 그의 등번호는 20번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조국의 4강 신화에 감동한 그는 홍명보(올림픽대표팀 감독)를 롤모델로 삼았다. 홍명보가 가시와에서 뛸 때 썼던 20번을 단 것이다. J-리그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자연스럽게 일본이 그에게 눈길을 줬다. 2007년 소리마치 야스히루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귀화를 제안했다. 고민을 했다. 하지만 선택의 폭은 크지 않았다. 일본 국적을 얻은 이충성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했다. 자이니치(재일교포)가 귀화해 일본 대표선수가 된 것은 이충성이 최초였다.
마음 속의 조국은 버릴 수 없었다. 2009년 산프레체 히로시마로 이적할 때는 노정윤이 단 9번을 달라고 했다. 한국 선수를 그리며 그라운드에 한을 쏟아냈다.
카타르아시안컵은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A대표팀에 발탁됐다. 11일 요르단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요르단전에서 그는 들떠 있었다. 허둥지둥했다. 볼과 따로 놀았다. 기회를 잃었다. 한국과의 4강전도 벤치에서 지켜봤다.
마지막 무대인 결승전에서 기회가 왔고, 그는 결승골로 설움을 떨쳤다. 독일 축구 전문 키커는 일본의 아시안컵 우승 소식을 전하며 '한국인 이충성이 일본의 우승을 쏘아 올렸다'는 제목을 뽑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충성은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었다. 진정한 축구 스타였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