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운동권 출신,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부인은 설란영(58)씨다. 그는 70년대 구로공단의 전자제품 부품공장 노동자 출신이다. 설씨는 1978년 노조위원장이 됐고 이후 다채로운 노동·인권운동으로 16년을 가열차게 '운동권'으로 지냈다. 그러다 김문수 지사가 신한국당 부천 소사 지구당을 맡은 94년부터 16년 넘는 세월을 그는 '전향 보수 김문수'의 내조자로 살아왔다. 운동권 16년, 내조 16년.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과 강하게 부딪치며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벌써부터 '대권'을 향한 스파링이 시작된 분위기다. 한나라당에서 잠재적 대권후보에 속하는 김문수 지사가 여러 고비를 넘겨 만일 꿈을 이룬다면, 우리는 최초로 노조위원장 출신 퍼스트레이디를 갖게 된다. 설난영이란 사람이 궁금해졌다. 자신과 김문수 지사의 뜨거웠던 과거 얘기를 담담하게 풀어낸 글을 인터넷에 올려 화제가 된 시점이다.
―인터넷 글이 화제가 됐다. 다른 대선 후보들의 움직임에 자극받은 것인가.
"며칠 전 어느 언론사에서 물어와 처음으로 간략하게 정리해드린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인턴 기자에게 김문수 지사의 이미지를 물으니 '합리적 보수로 보인다'더라. 어떤 점이 그런 인상을 줄까.
"지금 도의회는 민주당이 우위다. 경기도 역시 무상급식 문제를 두고도 논란이 있었다. 무상급식은 어려운 계층부터 점진 확대해가고, 친환경급식으로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한편으로는 지역 농어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자는 안을 내놓아 파행 대신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 때문이 아닐까."
―'친환경급식'안이 결국 좌파 무상급식 논리에 굴복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무상급식 예산을 돌린 게 아니라 친환경 급식 예산을 따로 편성한 것이므로 둘은 별개의 문제다."
―김 지사가 15대 의원일 때, 결식아동 무상 급식을 입법했다. 그것과 무상급식은 결국 같은 얘기 아닌가.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교육, 여러 '무상' 얘기가 나오는데 그걸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스웨덴 핀란드 등은 GDP(국내총생산)가 1인당 4만~5만달러인 국가다. 세금도 소득의 40% 정도라더라. 우리에겐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 아닌가. 지향은 하겠지만, 어려운 계층부터 혜택을 주면서 점진적으로 해가는 게 순리다."
―어떤 이들은 '김문수는 진짜 보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과거의 활동경력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김 지사는 85~88년 감옥에 있으면서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면서 사상의 변화를 겪었다. 혁명하겠다던 그가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낸 것이다. 북한과 비교했을 때 눈부신 우리의 경제성장도 그 근거 중 하나였다. 그게 벌써 25년이 넘었다."
―그러면 설란영이라는 사람도 '전향'한 것인가.
"나 자신이 어떤 확고한 이념이 있었다기보다는, 기본권조차 지켜지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에 더 자극받았다. 때문에 최소한의 근로기준법이라도 지켜달라고 함께 했을 뿐이다.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것 아닌가. 그 시대는 '먹는 문제'가 이슈였다. 전향이란 용어는 나에게 맞질 않는다. 나는 그저 눈앞의 어려움을 말했던 것이니까."
―정치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다던데.
"민중당을 창당했을 때도 그랬지만, 신한국당 입당했을 때 반대를 많이 했다. 운동권 시각으로 볼 때, '재야는 투명하고 깨끗하고 맑다, 정치권은 탁하다'고 생각했다. 정치를 하면 순수성이 훼손될 것이라 생각했다."
―진짜 운동권은 맑고, 정치는 탁하던가.
"이분법적으로 이쪽은 맑고, 저쪽은 더럽다고 말하긴 어렵다. 게다가 남편이 지금 정치를 하고 있지 않나.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진 것 같다."
―자기주장이 강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정치인 아내란 싫어도 좋은 척 웃어야 하는 자리 아닌가. 잘나가는 사모님들이랑 '사교'도 해야 하고.
"과거에는 어땠나 잘 모르겠지만, 요즘 정치인 부인들은 지역 시설방문, 독거노인 방문 등을 자주 한다. 십수 년 전에는 패션쇼처럼 신경 쓰는 사람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수수하게 변한 것 같다."
―군인은 남편 계급이 부인계급이라더라. 공무원도 비슷하지 않나. 여러 곳에 봉사를 다니는데, 공무원 부인과 함께 다니나. 그러면 '누구 부인이 괜찮더라' 이런 얘기 나오고 결국 인사로 연결되는 것 아닌가.
"우르르 사람 몰고 다니면서 이벤트처럼 하면 시설에서도 싫어한다. 수행하는 공무원 한 분과 다니고, 31개 시·군 단체장 부인과 해당 시설을 둘러보고 개선점을 찾을 뿐이다. 인사 문제는 결코 개입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관심도 없다."
◆문학소녀, 노조위원장이 되다
53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한 설란영씨는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네살 때 순천으로 이사해 거기서 여고를 졸업했다. 졸업하던 해 대학에 낙방, 서울로 올라와 재수 생활을 하다 77년 여름, 구로공단의 세진전자에 입사했다.
―세진전자에는 어떻게 입사했나.
"서울 친척집에서 재수학원에 다니다 몇년 내리 낙방했다. 버스에서 우연히 순천여고 동창을 만났는데, 구로공단에 다닌다더라. 친구가 추천해준 곳이 세진전자였다. 제품 전량이 일본에 수출되는 회사로 조건이 괜찮은 편이었다. 경험 삼아 다녀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들어갔다. 전자제품 부품 만드는 공정 중의 하나를 담당했다."
―서울 올라온 게 73년인데, 그 사이엔 뭐했나.
"계속 대입준비를 하고 실패했다."
―원하던 대학이 어디였기에, 낮춰서 다른 데 가면 되는 것 아닌가.
"고려대 국문과. 거길 원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데는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그렇게 꽉 막힌 성격인가.
"제가 7남매 중 셋째, 딸로는 장녀다. 아버지가 장녀의 기를 많이 살려주고, 내 뜻대로 하게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그래서 고집 아닌 고집이 생긴 것 같다."
―딸이 대학 안 가고 노조위원장 한다니, 집에선 반응이 어땠나.
"아버지는 시골 교사라 노조에 대한 구체적인 부분은 잘 모르셨다. 저에 대한 믿음도 강했고. 뭘 하긴 하는데 열심히 한다 이 정도만 생각했었다."
―노조위원장은 어떻게 됐나.
"입사 후, 6개월 만에 노조가 결성됐는데 난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듬해 노조위원장이 만나자더니, '안 하겠다는 말만 하지 말라'며 노조를 맡으라더라. 노조가 결성됐는데 회사에서는 인정을 안 하니 힘든 상황이었다. 내가 사람들과 잘 지내고 리더십도 있어 보였나 보다. 며칠 후 투표해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만들더라. 일주일 고민하다 한번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뭘 했나.
"공단에서 잘나가는 노조에 가서 사람들 만나고, 상급단체에 가서 공부도 본격적으로 했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나.
"아버지가 교사였으니 7남매가 겨우 먹고 사는 정도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제게 책도, 음악도 많이 경험하게 해주셨다. 어디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으며, 조금은 정신이 사치스럽기도 했다. 교만한 마음도 있었다. 내가 다른 노동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직장이 평생직장이 아니라 그냥 거쳐 가는 거다, 난 더 나은 곳으로 갈 거다'. 그래서 사람들과 잘 지내면서도 깊이 사귀거나 마음을 주지는 않았다. 노조위원장이 되고 나서는 인생관이 달라지더라. 나 하나로 이 사람들의 근무여건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진다 생각하니 이타적인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그때부터 생겼다. 그들의 대변자라는 생각이 많았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죄짓는 것 같아서 억제했다. 그렇게 사는 습성은 아직까지도 그대로인 것 같다. 김 지사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돼지껍데기 구워먹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다."
―문학을 꿈꾸다 사회과학 공부하니 재미있던가.
"60, 70년대 쓰여진 한국 명작을 읽다가 '볼셰비키 혁명사'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나'(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 지음), '어머니'(막심 고리키 지음) 같은 책을 읽자 세상 많은 것이 달리 보이더라. 그런 책을 읽고, 그런 사람을 만나면서 의식이 더 굳어지더라. 김 지사가 부천 가기 전까지 만나는 사람이 모두 '��(운동권)'에 있던 사람들이라 대화도 모두 그런 데 관한 것이었다. 94년 (선거 출마위해) 부천으로 이사 와서 어느 산악회에 나갔는데, '누구 집에서 콩나물국에 김치 먹었는데 맛이 어떻다' 얘기를 해서 정말 깜짝 놀랐다. 성인 여자가 콩나물국을 주제로 얘기를 하다니, 이런 반찬 얘기가 주제가 되나 싶더라. '조직활동을 할 것인가' 이런 게 얘기지, 이런 걸 말이라고 하고 있나 싶더라. 그런데 제가 요즘 그러고 있다. 이제는 정말 생활인이 되어서, 현실에 발붙이게 됐다. 81년 결혼 후, 서점을 운영하면서도 손님을 차별했다. 일반인이 와서 소설을 고르면 '저 사람 이런 쓸데없는 책을 보다니, 이런(사회과학) 책을 봐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돈 벌면서 이중적인 사고를 했었다. 내 의식이 서서히 변하면서 우리 서점에 오는 손님을 모두 기쁘게 대하게 됐다. 환경이 그만큼 무섭다."
―그런 세계에 빠져 있다가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됐나.
"노조위원장이 된 후, 나한테 잘 맞는다, 평생 이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 결심했다. 그때 남편(당시 김문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제적당하고 한일도루코에서 노조 활동을 했다)을 만났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많지만 어려 보여서 한 번도 남자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는 우리에게 노동법과 각종 이론을 학습시켜줬다. 주변에서 보기 힘든 귀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노동운동 함께 한다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다고만 생각했다. 알게 된 지 7개월 후쯤, 다방에서 차 한 잔 시키더니 '갈 데 없으면 나한테 와라' 하더라. 저도 담담하게 '아, 아니다. 난 결혼 생각 없다. 김문수씨는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니 다른 사람 더 생각해보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동안에 학벌도 좋지 않았나.
"한때 결혼에 대해 생각해봤을 때, 고집 센 나를 리드해 줄 나이 많은 사람과 하겠다 생각했었다. 결혼하면 노조운동도 못하지 않나."
―지사께서는 왜 청혼을 했다던가.
"자기는 평생 험난한 길을 갈 사람이라고 하더라. 내가 여성으로서 예쁘기보다는 의지가 강하고 분별력 있고 정의로운 점이 좋다더라. 혁명가를 꿈꾸는 자기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그걸 능히 극복하고 살아갈 여성, 누가 보호하지 않아도 스스로 강한 여성으로 보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
"청혼 후, 보름도 안 된 79년 1월 4일 행방불명됐다가 40일 만에 나타났다. 다들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더라. 평소엔 나에게 너무 친하게 굴어서 싫었는데, 그땐 나와 말도 섞지 않더라. '왜 그러느냐.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 것 아니냐. 두 시간만 얘기를 하자'고 했더니 '200시간도 괜찮다. 처녀 총각 만나는데 시간이 문제냐'며 다시 적극적으로 나오더라. 청혼 거절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더라. 40일간 고생해 몸도 축나 보이고 안됐더라. 모성본능 같은 게 좀 생겼다. 그다음 해 결혼했다."
―다시 수배를 당해서 도피 중에 찾아왔다던데, 그때 연애감정이 생겼나.
"동생이 80년 마포에서 제과점을 운영했다. 거기 방이 하나 딸려 있었는데 당시 수배 중이던 그 사람이 더 이상 친구집에도 가 있기 어렵다며 필요할 때만 와 있겠다 하더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서 '사고'도 일어났나.
"동생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전혀 없었다."
―81년 결혼식 사진을 보니 드레스는 안 입었더라. 신랑신부도 동시입장했다고 하고.
"남편은 내가 한복을 입었으면 하더라. 남자는 양복, 여자는 한복은 좀 이상하겠더라. 영등포 맞춤집에서 연보라색 원피스로 맞췄다. 결혼한다는 얘기 안 하고, 그냥 좋아했던 색이라 했다. 뭘 모르고 한 거다."
◆뜨거운 증오·사랑을 넘어
―결혼해선 어땠나.
"결혼 후 회사 갔다가 남편이 하고 있던 서점에 돌아오면, 수배자·해고자로 바글바글하고 설거지 그릇이 쌓여 있었다. 임신한 몸으로 돈벌고, 그들 다 밥해 먹이느라 정말 일이 많았다. 토론이다 뭐다 해서 다들 모여서 한방에 자고 사생활이라는 게 없었다. 94년 부천 지역구에 가서야 겨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김 지사가 서노련 사건으로 85년 구속됐을 때, 고문당한 흔적이 있는 셔츠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던데.
"면회 갔더니 옷을 들어 배를 보여주는데, 배 앞쪽에 전기고문을 위해 테이프를 붙였던 흔적이 보이더라. 전기고문에 왜 피가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셔츠에 핏방울이 있더라. 버리는 것이 뭣해서 빨아서 두고 있다."
―아무리 인생의 지향이 있다 해도, 남편이 고문당하는 것 보면 다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 않았나.
"잠실 아파트에 군인들이 달려와 유시주(유시민 동생)·김문수 등 10여명을 잡아갔다. 보안사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거다. 나는 민간인을 군부대에서 데려가 고문하는 군부정권의 폭력성·잔혹성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어디서 어떻게 고문당했나, 이런 사실 확인하고 외부에 알리느라 바빴다. 그땐 나도 열혈 운동권이었다. 간혹 우는 부인들을 보면 '남편 마음 약해지게 저 여자 왜 저러나. 저렇게 짜면 마음이 흔들려서 재판받을 때 마이너스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었다. 3심까지 가는 1년간 울 겨를이 없었다."
―아들 대학 졸업을 염원했다던 김 지사 어머니가 아들이 수배를 당하던 74년 결국 암으로 돌아가셨다. 살아계셨으면 결혼을 허락했을까.
"남편을 워낙 믿어주셨던 분이니 허락했을 것이다. 결혼할 때 집안 어른이 '경상도에 여자가 없어서 전라도에서 여자를 데려오느냐'며 반대하셨다(김 지사 고향은 경북 영천). 그러나 사람이 중요하지, 고향이 무슨 의미 있느냐는 남편의 한마디로 논란이 없어졌다."
―운동권 가정에선 100% 남녀평등이 이뤄지나.
"머릿속에만 그렇지 실제로 그런 남자는 한국에 별로 없지 않나. 그래도 정치를 하기 전엔 청소기도 돌리고 설거지도 잘해줬다. 설거지의 세 가지 즐거움을 꼽더라. 아내를 돕는다,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낸다, 찬물이 청량감을 준다. 부천에 가고 나서는 새벽부터 자정까지 뛰어다니니 가여워서 못 시키겠더라. 나보다는 딸이 자라는 걸 보면서 진짜 남녀평등에 관한 확고한 생각이 들게 됐고 그걸 정책으로 밀고 나가더라."
―운동을 접은 것은 언제인가.
"한국여성노동자회 부회장까지 하다가 94년 남편이 부천 소사 지역구를 맡으며 그만뒀다."
―그러면 부자 남자 만난 여자가 자기 인생 포기하듯 그렇게 한 건가.
"처음에는 고민하면서 부천에 혼자 가서 출퇴근하라고 했다. 그런데 좀 지나고 보니 내가 하는 일과 다를 바 없더라. 노조를 하면서 노동계층에만 집중했다면, 정치는 빈민부터 일반인까지 영역이 더 확대된 것이더라. 내 일의 범위가 넓어진 거다. 노조운동을 통해 이 일을 하기 위한 기회를 미리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조운동은, 노조원끼리는 따뜻하지만 자본가를 집단적 증오의 대상으로 삼지 않나.
"그땐 그랬다.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을 아직도 만나는데, 이제는 노조도 합리적, 노사협력적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더라. 너 죽고 나 산다, 이런 스타일의 운동시대는 지났다."
―뜨거운 증오와 뜨거운 사랑의 시절을 돌아보면 어떤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가장 어려운 시대, 가장 어려운 영역을 담당해왔다고 생각한다."
―올 한 해 정치계 화두는 '복지'가 될 것이다. 지사께서는 어떤 복지를 펼쳐왔나.
"소득이 있는 아들을 호적에 둔 독거노인은 법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법적 사각지대에 있는 이런 분들을 위한 무한돌봄, 맞벌이 자녀를 위한 꿈나무안심학교 등 실제 복지 부분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본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가 먼저 복지론을 던지지 않았나. 정치란 '단어' 싸움이기도 한데, '김문수 복지론'은 없다.
"김 지사가 박 대표의 복지론이 이론적으로 탄탄하다고 하더라. 그런데 김 지사는 이미 복지를 현실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박 대표는 이미 경선까지 치른 완전한 후보가 아닌가. 하지만 김 지사는 재선에 성공한 후 잠재적 대권주자로 불리는 것이지 한 번도 대선에 나가겠다 말한 적이 없다. 그럴 때도 아니고, 자칫 정책이 대선용이라 오해받을까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사회복지학과 나온 딸은 뭐 하나.
"아르바이트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올해 서른인데 결혼을 안 해 걱정이다."
―아버지가 취직 하나 못 시키나.
"노는 조카들도 있는데, 걔만 취직시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정치인 김문수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단점은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단점은 돈이 없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게 자랑이냐'는 말을 들은 이후 그런 말은 잘 안 한다. 웃지 않으면 딱딱한 이미지도 단점이다. 자상한 면이 꽤 많은데…. 정치인 중에는 후덕하고 편안하고 잘생긴 인물들이 있지 않나. 장점이라면, 청렴하고 깨끗하고, 처음과 지금이 같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 좋은 인간형이다."
―그럼 다음 생애에도 남편과 결혼할 건가.
"그건 모르겠다. 생각해봐야겠다."
그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올 때, '순정(純正) 부품'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불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