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 1874~1926)에게 숨겨진 후손이 있었고, 나중에 그 후손이 자신임을 알게 된 여대생이 진짜 공주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요즘 한 TV드라마는 이런 생각을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이야?"
우선 순종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는 고종(高宗·1852~1919) 황제의 9남 4녀 중 명성황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2남이었다. 순종에게는 순정효황후 윤씨와 일찍 세상을 뜬 황태자비 민씨가 있었으나 누구에게서든 '후사가 없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순종은 황태자 시절이던 1898년 러시아 통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하기 위해 커피에 타 놓은 아편 때문에 성치 않은 몸이 됐다는 설이 있다. 커피 마니아였던 고종은 향이 다르다는 것을 금세 알아채고 반 모금만 마셨지만, 황태자는 단숨에 벌컥 들이켰기 때문에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순종은 '삼국지'의 유비형(型) 인물이었던 그의 아버지와는 달랐다.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면서도 비밀리에 일본의 침략을 고발하는 밀서를 각국에 보내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파리 강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려 했던 고종 황제 말이다. 지척에서 어머니가 시해되는 참변을 겪었고 강제로 사직을 빼앗겼던 비운의 황제 순종은, '항일 의지'와 관련해서는 논란이 될 만한 기록을 갖고 있다. '순종실록' 끝 부분인 1910년 8월 29일조, 한일강제병합 당일의 기사에서 황제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제국 황제 폐하께 양여해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팔도)의 민생을 보전하려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해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국내 학자들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만든 조서일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순종이 이런 조서를 내렸다'는 사실 자체를 뒤집지는 못한다. 국권 강탈 당시 어전회의장 병풍 뒤에 숨어 있다가 치마폭에 옥새를 숨기고 끝까지 저항했다는 황후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럼 조선왕조의 왕통은 어디로 이어졌는가. 고종은 귀인 장씨와의 사이에서 의친왕(의왕) 강(堈)을, 순헌황귀비 엄씨와의 사이에서 영친왕(영왕) 은(垠·1897~1970)을, 귀인 양씨와의 사이에서 덕혜옹주를 낳았다. 의친왕은 13남 9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후사가 없는 순종이 즉위한 1907년,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영친왕이었다. 어머니가 명성황후 사후 비(妃) 중에서 최고 서열이었기 때문에 이복형 의친왕을 제친 것이다. 나라가 망한 뒤 왕세제(王世弟)로 격하됐지만 황실(왕실)은 '이왕가(李王家)'란 이름으로 유지됐다.
영친왕은 일본 왕족 이방자(李方子)와의 사이에서 아들 구(玖·1931~2005)를 얻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세손이었던 이구는 자녀가 없었다. 광복 이후 이승만 정부는 옛 황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황실의 해체였다.
또 하나 궁금증. 그렇다면 이 드라마처럼 '황실복원(皇室復元)'을 실제로 추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있다. 대표적인 곳이 '대한황실 복원 추진회'를 모태로 하는 '황실문화재단'이다. 이들이 발간하는 학술지 '황실학 논총'의 1997년 창간호 표지엔 '융희(隆熙) 91년'이란 연도가 선명하게 인쇄돼 있다. 융희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다.
일단 실현가능성은 제쳐두고 황실복원이 이뤄졌을 경우를 상상해 본다면, 국호는 다시 '대한제국'이 될 것이고, 경복궁은 황실의 성대한 연회가 열리는 살아 있는 궁궐로 변할 것이며, 황태자와 공주의 일거수일투족이 세간의 관심을 모을 것이고, 취업난에 빠진 젊은이들은 상궁과 무수리 공채로 몰려들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위해 세금을 부담하는 데 찬성할 국민들이 얼마나 될지는 무척 의문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