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남부 휴양도시 달랏(Da Lat) 사람들은 김진국(金振國·75) 교수를 '파파'라고 부른다. 베트남 명문 달랏대학교의 레바�X(Le Ba Dung) 총장도 "나는 파파가 둘이다. 한 분은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고 다른 한 분은 파파 킴이다"고 말한다. 총장뿐만 아니라 동양학부 교수들도, 대학생들도 그를 보면 "파파"라고 부른다.
대구효성여대에서 화훼장식학을 가르치던 그는 1990년대 초반 '제2의 정착지'를 찾아 동남아 10개국을 2년간 돌다가 1994년 달랏을 찾았다. 현지 관공서와 담판을 지어 산비탈 돌산 개간을 허가받았다. 움막을 짓고 삽과 괭이로 바위를 깨고 돌을 날랐다. 8년 동안 어깨가 으스러지고 손바닥이 까지는 험난한 작업으로 5000평을 계단식 밭으로 개간했다.
첫해 한국에서 가져다 심은 난(蘭)과 장미 2만주는 대부분 도둑맞았다. 다음해엔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안개꽃을 심었다. 해발 1500~1700m 고랭지라 품질이 최고였고, 5~11월 우기(雨期)에도 비닐하우스 '비 가림 재배'로 연중 생산하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1년에 한두 번만 수확하던 현지인들은 연간 네 차례나 수확하는 김 교수를 보고 따라 했다. 해가 갈수록 비닐하우스가 달랏의 들판을 채웠고, '비닐하우스 바다'는 달랏의 상징이 됐다. 밤에는 비닐하우스 불빛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전깃불로 꽃들의 개화기를 조절하는 선진 농법이 보급된 것이다.
'한국에서 온 미친 노인'은 점점 '달랏의 보배'가 됐다. 김 교수는 회사를 만들어 자신이 생산한 화훼·채소는 물론 이웃이 생산한 농작물도 사들여 대도시에 출하해줬다. 국화와 카네이션의 일본·싱가포르 수출길도 열었다.
그러는 사이 달랏의 화훼·채소 농가는 부유해졌고, 집들은 그림엽서처럼 예쁘게 변해갔다. 베트남 1인당 GDP가 1000달러 정도지만 달랏의 농가 수입은 4000~5000달러에 이른다.
그의 도움으로 달랏대에는 2005년 농과대학, 2006년 난(蘭)연구센터가 만들어졌다. 2004년엔 한국어학과를 개설해 작년 봄까지 졸업생 220여명을 배출했다. 달랏대는 지금 한국의 26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달랏대 안에 짓는 한국·베트남 학술원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60만달러를 모금할 계획이었으나 15만달러밖에 모이지 않았고 기자재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 지금 한국에 가면 노인 취급을 받겠지만 여기선 내가 필요한 사람들과 할 일이 아직도 많아요." 그는 제2의 고향 달랏에 뼈를 묻을 생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