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단의 피아노가 객석 코앞으로 내려왔다. 악보는 없다. 공연 중 사진 찍는 남자도 있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돌리는 여자도 있다.
분명 정통 클래식 콘서트는 아니다. 비틀스의 '헤이 주드', 동요 '오빠생각', 가요 '마법의 성'을 쇼팽만큼이나 우아하게 혹은 현란하게 연주한다. 팔순 할머니도 등장한다. 다듬잇돌 두드려 장단을 깔아주니 젊은 여인이 구슬프게 피리를 분다. '엄마야 누나야'다.
이제 연주자는 피아노 대신 아코디언을 집어들었다. 콘셉트 못 잡는 청중을 향해 연주자의 장광설이 쏟아진다. 연미복과 따로 노는 경상도 억양에 능청이 섞이자 웃음이 왁자하다. 마당놀이인가? 이 해괴한 콘서트의 이름, '피아노와 이빨'이다.
2005년 11월 시작해 2010년 12월 31일로 945회를 맞은 공연. 검은색 연미복에 긴 머리 휘날리며 피아노를 요리하는 남자 윤효간(48)이 호스트다. 넉살이 수퍼헤비급이다. "저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편곡자이기도 하지요."
문제는 그 '허풍'이 요즘 현실로 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한 소극장에서 시작한 '피아노와 이빨(Piano & Tooth)' 공연이 캄보디아, 미국, 호주, 중국의 장벽을 넘었다. 지난해 지진으로 수만명이 사망한 쓰촨성에서도 공연했다. LG, 기아, 삼익악기가 이 콘서트를 후원한다. 5년간 관람객이 국내외 100만명이다. 새해 1000회 공연을 돌파한다.
정통 클래식 연주계에선 쳐주지 않는다. 라흐마니노프도, 말러도 없으므로. 뭣보다 연주자의 '스펙'이 신통찮다. 최종 학력이 고졸. 클래식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윤효간의 골수 마니아에 따르면 "길거리에서 파는 불량식품 같은" 콘서트다. 건강엔 나쁘지만 중독성 강한 공연, 클래식도 대중음악도 아닌 이 어정쩡한 콘서트를 사람들은 왜 찾아올까. 945회 공연이 끝난 뒤, 윤효간을 만났다.
■클래식이 지루한 중년 남자들을 위한 '쇼'?
―유명 예술가의 공연도 아닌데 객석이 거의 다 찼더라.
"'피아노와 이빨' 청중의 70%가 중년 남성들이다. 일반 클래식 공연 가서 하품하시던 분들 여기 와서는 안 존다. 피아노의 '피'자만 들어도 경기 일으키던 아저씨들한텐 그야말로 '쇼'다. 그리고 말인데, 나도 꽤 유명한 피아니스트다."
―근거가 있나.
"1000회 공연, 아무나 가능한가. 사막에 피아노 끌고 가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보셨나. 나, 윤효간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 중이다. 2012년 금성출판사 음악 교과서에 윤효간의 '피아노와 이빨' 공연이 수록된다."
―공연의 콘셉트는? 비틀스부터 마법의 성까지. 정체불명이란 오해를 받기 딱 좋겠더라.
"피아노 콘서트, 천편일률적이지 않나. 내 콘셉트는 소박하다. '피아노 레슨'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피아노, 굉장히 평범하고 재미있고 착한 악기라는 거 보여주고 싶었다."
―기왕이면 폼나게 쇼팽이나 모차르트를 한 곡 넣지 그랬나.
"어려울 것 없다. 고려해보겠다."
―다듬잇돌 할머니는 왜 나오시나.
"다듬이질, 젊은 사람은 못한다. 연기 잘하는 배우도 못한다. 그 맑은 음과 장단, 삶의 연륜이 없으면 나올 수가 없다. 세상엔 테크닉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게 많다."
―레퍼토리가 매번 똑같은 것은 아쉽다.
"내 음악 인생이 공연의 스토리 라인이라….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외로웠다.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 없어 집을 나왔고, 밑바닥을 전전했다. 가장 절망했던 시기에 용기를 준 것이 비틀스였다. '헤이 주드'로 시작해 '이매진'으로 끝나는 것은 그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다."
―창작곡도 있지 않나.
"중간 중간 잘 모르는 음악이 나오면 그게 내 곡이다.(웃음) 내 곡이냐 남의 곡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감동이 중요하지."
―동요에 남다른 애착이 있더라. 김수현 드라마 '홍소장의 가을'에 배경음악으로 나와 히트한 앨범 '풍금이 흐르는 교실'은 우리 동요 10여곡을 전혀 다른 차원의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우리나라에 동요만한 명곡이 없다. 외국 나가 내가 편곡한 우리 동요를 들려주면 이렇게 아름다운 클래식이 있었느냐며 감탄한다. 동요엔 치유의 힘이 있다."
―비올라와 첼로, 피아노가 협연하는 '과수원길', 색소폰과 실로폰, 피아노가 조우하는 '섬집아기', 해금으로 켜는 '꼬부랑할머니'는 정말 좋았다.
"원곡을 따를 순 없겠지. 하지만 편곡은 오리지널과는 또 다른 음악 세계를 열어준다."
■'유엔성냥' 막내아들, 피아노를 걷어차다
'편곡'에 대한 윤효간의 애착은 김현식, 이승철, 조영남, 패티김, 주현미 등 우리 대중음악사의 내로라하는 가수들 앨범의 세션맨으로 명성을 날렸던 자신의 이력과 맞닿아 있다. 그가 세션에 참여한 곡만 1000여곡. KBS관현악단을 거쳐 박춘석악단 멤버로 13년간 활약하면서는 이미자와 호흡을 맞췄다. '원곡대로 치지 않는' 편곡자의 기질은 유년 시절 '클래식 피아노에서의 일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연 때마다 '고졸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의 학력을 당당하게 공개하는 그다.
―부잣집 아들이었다고 자랑하더라.
"'정보 공유' 차원이다. 팔각성냥으로 유명한 유엔성냥 기업 막내아들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1960년대에 자식에게, 그것도 남자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집이었으니 그냥 잘 사는 정도가 아니었겠지."
―부모님 시키는 대로 얌전히 공부했으면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다녀왔을 텐데.
"6학년 때 서울서 열린 피아노 콩쿠르에 갔었다. 세상에서 내가 피아노를 가장 잘 치는 줄 알았는데, 거기 나온 스무 명 아이들이 나만큼이나 잘 치더라. 문제는 나를 비롯한 모든 아이가 피아노를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스타일로,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친다는 것이었다. 부산 내려와 선생님께 물었다. 왜 악보대로만 쳐야 하나요? 악상기호와 반대로 치면 피아노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나요? 다음날부터 악상기호와 반대로 치기 시작했다. 원음보다 한 옥타브 위에서 치느라 건반 바깥 나무판을 쳐대기도 했다. 최저음과 최고음을 눌러도 음악이 되더라. 나는 신났는데, 선생님 다섯 명이 교체됐다. 부모님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결국 가출했다.
"가출 시도 일곱 번 만에. 어디 있는지 귀신같이 찾아내시더라.(웃음) 고등학교 졸업 앞두고 수중에 3만8000원 쥐고 서울로 올라왔다"
―'왕자와 거지'처럼 하루아침에 꽤 험난한 인생이 펼쳐졌겠다.
"영등포역에서 노숙했다. 지금도 거기 가면 마음이 찡하다. 그러다 이태원 크라운호텔 나이트클럽으로 갔다. 대기실에서 2년간 숙식하면서 밴드의 키보드를 쳤다. 나쁘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11시 반 방향에서 빛이 보이더라. '바닥'의 음악은 내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피아노 연습도 원 없이 했다. 건반을 다 뜯어가면서 음을 헤집었다."
―KBS관현악단에는 어떻게 들어갔나.
"오디션 보고 들어갔지. 피아노를 잘 치니 유학파들 제치고 날 뽑더라. 서른 살이었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실제 소리를 그때 처음 들었다. 눈물 나도록 행복했다."
―관현악단에서 출세할 길을 노려보지, 왜 또 4년 만에 뛰쳐나와 박춘석악단에 들어갔나.
"아름답다고 그 사운드에만 젖어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저 건너편에는 또 뭐가 있지? 궁금했다. 박춘석악단 들어가 아코디언을 배웠다. 내가 아코디언으로 '동백아가씨'를 연주하면 다들 껌벅 넘어갔다. 트로트의 진수를 배웠다. 조직의 쓴맛, 인생도 함께."
―박춘석악단을 나오게 된 에피소드가 있다던데.
"2002년 이미자씨가 평양 공연을 하게 됐다. 서울서 연습 하는데 검은색 선글라스에 검은색 양복 입은 사람들이 와서는 나더러 대뜸 머리를 자르라고 하더라. 아코디언 잡은 자세도 삐딱하다며 바로 앉으란다. 그래서 한마디 하고 나왔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1루에서 발을 떼야 2루로 갈 수 있다
―유명 가수들 세션맨으로 크게 성공했다. 왜 그만뒀나.
"이제는 나만의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나이 마흔이면 누군가의 뒷자리에서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말리는 사람 많았다. 겁도 주더라. 하지만 2루로 나가려면 1루에서 발을 떼어야 했다."
―'피아노와 이빨' 콘서트가 그 출발점이었나.
"140석 소극장에서 시작했다. 700회까지는 힘들었지. 고맙게도 한번 보신 분들이 주위에 입소문 내주시더라. 덕분에 고비고비를 기적적으로 넘겼다."
―2007년부터는 해외 공연을 시작했다. 대단한 모험이다.
"음악은 만인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구현하려면 피아노가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트럭에 피아노를 싣고 시골 분교를 찾아다니며 공연했던 것이 해외로 확장된 셈이다. 서로를 보는 시선에 높고 낮음이 없는 것, 살아가는 환경과 형편은 다르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따뜻해야 하는 것. 그것이 내 음악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중국 어느 농민학교에서의 공연은 실황 중계로 봤으면 좋았을 뻔했다.
"중국YMCA 초청으로 지난해 9월부터 65일간 중국 투어를 했다. 80년 역사를 지닌 농민학교를 포함해 쓰촨성 지진현장의 잔해만 남은 학교에서 연주했다. 농민학교에서는 80년 만에 처음 열린 음악회였다. 피아노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더라. '공안'들도 좋아라 박수치고. 쓰촨성에서는 내 피아노 연주에 대한 화답으로 1000명의 살아남은 아이들이 수화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용기와 위안을 주러 갔다가 내가 더 감동을 받고 왔다."
―2009년 호주 시드니오페라하우스에도 '피아노와 이빨' 공연으로 선 건가.
"물론이다. 오디션 위해 이제까지의 공연 자료와 앨범 다 보여주고, 동요 악보를 냈다. 음악의 장르를 엄격히 구분하고 차별하는 우리와는 달랐다. 반응? 비틀스의 음악이야 당연히 좋아했고, 우리 동요를 연주할 땐 기립박수가 나왔다."
■자기만의 베토벤을 연주하라
―올해 연주 계획은?
"하반기에 미국 투어를 한다. 7월에 국립극장 공연이 한 번 더 있고, 9월에 다시 중국에서 65일 투어를 한다. 연평도에서 연주회를 하고 싶어 국방부에 알아보고 있다."
―카네기홀에도 가야겠네.
"나는 아이들과 학교에서 공연하는 게 가장 좋다. 처음엔 시큰둥하다. 하지만 내가 '고졸'이라고 하면 아이들 눈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말을 걸어온다."
―그런데 왜 그렇게 머리를 피아노에 묻고 연주를 하나.
"끊일 듯 말듯 이어지는 농축된 선율을 뽑아내려면 그 자세 아니면 안 된다."
―건반을 팔꿈치로도 치고, 주먹으로도 치더라. 발은 또 왜 그렇게 굴러 대나.
"피아노 하나로 실로폰 소리, 자장가 소리, 오르골 소리, 천둥 소리, 호랑이 소리를 다 내야 하는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자로 손등 맞아가며 배운 반듯한 자세로는 결코 낼 수 없다."
―'피아노와 이빨'에 아저씨들이 많이 오는 이유는 뭘까.
"대리 만족 아닐까. 내 거친 삶, 곡절 많은 음악 인생에서 '다시 살아보자' 용기를 얻는 것 같다."
―진로 상담받으려는 음악도들이 많다더라. 어떤 얘기 해주나.
"피아노는 '잘 치는 것', '감동이 있는 것', '살아남는 것'이 있다. 완전히 차원이 다른 세 가지 과목이다. 부모들은 이걸 한 가지 과목으로 생각한다. 피아노를 잘 치면 저절로 감동이 생기고, 살아남을 확률 또한 높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 자기만의 베토벤을 칠 줄 알아야 한다. 정도(正道)는 없다. 모두가 가는 길을 갈 필요도 없다. 나만의 음악을 만들어라. 그러면 무조건 1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