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PD 입사시험은 원서조차 받지 못했다. 이유는? 여자니까. 통역사로 일할 때는 괴로웠다. 남편은 뭐 하기에 당신을 일 시키냐는 물음이 끝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이들 데리고 미국으로 일하러 갔는데, 돌아오려니까 '엄마 따라간 아이들은 특례입학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사고를 쳤다. "여자 차별하는 나라에서 내 딸을 키울 수 없다"며.

미 국무부 선임외교통역사(Senior Diplomatic Interpreter) 이연향(53)씨 이야기다. 지난달 서울 G20 정상회의에 이어 최근 이명박-오바마 대통령의 연평도 전화회담까지 미국 대통령의 한국어 입과 귀가 된 이씨를 만났다.

“통역할 때는 튀면 안 되니까 이런 색은 절대 안 입어요.”새빨간 재킷을 입고 카메라 렌즈 앞에 선 이연향씨가 환하게 웃는다. 오늘의 주인공은 그 어떤 명사도 아닌, 바로 그녀니까.

이씨가 통역을 맡은 면면은 화려하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보즈워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스필버그, 빌 게이츠 등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인사가 수두룩하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도 한국어 공식 통역사였다.

최근 이화여대 교정에서 만난 이씨는 자그마한 체구지만 야무져 보였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 일 때문에 이란에서 국제중에 다닌 것 빼고는 한국에 살았어요." 결혼 후에도 남편이 유학 갈 때 따라가 미국서 2년 산 것이 전부다. 1996년 미국 몬트레이 통역번역대학원 한영과 교수로 부임할 때까지 한국에 있었다. "중학 때 배운 건 중학 수준의 영어지요. 그 단어로 통역은 불가능해요. 사춘기 때 영어책을 무지 많이 읽고 영작문도 많이 했는데 그게 진짜 도움됐어요."

통역을 업(業)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연세대 성악과 시절 교내 영자지 'Yonsei Annals'에서 활동하면서 간간이 아르바이트한 게 전부다. 평범한 여대생의 인생을 바꾼 계기는 성차별이라는 벽이었다. 그것도 세번씩이나.

첫 차별은 대학 졸업 때였다. 원래 꿈은 방송사 PD였다. 원서 받으러 동양방송(TBC)에 갔지만 꿈은 경비실 문턱도 넘지 못했다. "여자는 PD 못한다며 원서도 안 주더라고요. 대신 아나운서 지원서를 줬는데 관심 없었어요."

결국 전업주부가 됐다. 둘째가 세 돌이던 1989년 친구 권유로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했다. 서른 셋. 클래스 최연장자에 애 둘 딸린 엄마였다. 그래도 가사 탈출만으로도 신이 났다. 그녀는 "만학(晩學)이 열정을 키웠다"고 했다.

졸업 후 통역사로 일하자 이번엔 직업 여성에 대한 차별이 다가왔다. 이씨는 "매번 '남편은 집에서 노냐? 왜 애 엄마가 이렇게 일을 하냐?'고 물어왔다"고 했다. 다국적회사에 다니는 남편조차 아내 고생시키는 사람으로 비쳐질까 봐 웃으면서 "어디 가서 내 얘기는 하지 마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좌절. 남편을 두고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2년간 미국 몬트레이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다 1998년 귀국하려 할 때였다. "중3 딸을 고등학교에 특례입학시키려 했는데, 교육청에서 '아빠 따라가 외국에서 공부한 아이들은 대상이지만 엄마 따라간 아이는 자격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탄원을 거듭했지만 "그런 규정이 없어서…"라는 매정한 답만 돌아왔다.

그는 "여성 차별이 이렇게 심한 나라에서 딸을 키울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결국 남기로 했다. 그렇게 미국서 학교를 마친 딸 조동선(27)씨와 아들 조정욱(25)씨는 현재 싱가포르에서 일한다.

이씨는 2005년 이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로 임용됐다. 그리고 지난해 미 국무부에 채용돼 워싱턴에 산다. 이씨는 "외교 통역은 뉘앙스와 저의(底意)가 중요하기 때문에 거의 가감 없이 직역에 가깝게 통역한다"며 "선물이 내용물보다는 어떤 상자에 어떤 포장으로 담겼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써야 해요. 일례로 일반 통역에서는 'important'와 'critical' 모두 '중요하다'로 통역해도 문제없지만 외교 통역에서는 'important'는 '중요하다', 'critical'은 '매우 중요하다'로 통역해야 해요."

세계적 지도자를 가까이에서 본 인상은 어땠을까. "아무리 평이 좋지 않은 정상이라도 직접 만나면 그 자리에 오른 이유가 다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저마다 빛깔이 다를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