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 라스베가스에 도착하는 건 여행자에게 재앙이다. 이 도시는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라는 문장에 정확히 부합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잿빛 호텔은 아직 제 모습을 찾지 못했고, 늦은 밤까지 카지노를 즐겼던 사람들도 출몰하지 않았다. 마치 도시는 웅크리며 졸고 있는 짐승 같다. 때맞춰 어둠이 스미는 해질녘에 도착한다면 네온이 한 도시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한 편의 시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호텔뿐만 아니라 거리, 공항의 한 귀퉁이, 하다못해 작은 동네의 편의점에까지 카지노 기계가 있는 이 환락의 도시에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도시 심층부의 맥박이 분명히 느껴질 테니까 말이다.

"라스베가스에는 공항에도 카지노가 있기로 유명한데 치약을 사러 들른 편의점에도 슬롯머신이 있다. 24시간 영업하는 전당포 주위에는 역시 24시간 영업의 결혼식장이 있다. 여기서는 이혼 요청도 24시간 접수해 줄 것이다. 맘만 먹으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고 그 다음날 결혼해 그날 밤 파산하고 날이 새긴 전에 이혼을 한 뒤 자살까지 생각하다가 오후에 다시 기운을 차리고 심야까지 돈을 벌다 재혼하여 다음날 양자를 들여 오후에는 셋이서 제트코스터를 타며 절규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작심삼일이 아니라 삼일 인생!"

시마다 마사히코의 '퇴폐예찬'을 읽은 건, 2000년이 다가오면 밀레니엄 버그인 y2k로 세상이 뒤집힐 것이란 공포가 온 세계를 뒤덮던 때였다. 책에 일일이 밑줄을 그으며 나는 '라스베가스'를 '패스트푸드' 같은 도시라고 각인시켰다. 햄버거처럼 3초면 주문 완료되는 '자기완결형'의 도시. 모든 것이 3일 안에 가능하다는 건 분명 소설가적 상상력이었지만 분명히 기괴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본 것은 캐나다에서였다. 함께 하숙하던 일본인 친구 '요코'와 함께였다. 인생이 끝장난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마시다 삶을 마감하기 위해 라스베가스로 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창녀와 사랑에 빠진다, 라는 줄거리는 '신파적'이라는 말을 붙이기에 충분했다. 영화가 끝난 뒤 요코는 내게 물었었다. "저런 남자 만날까 봐 정말로 겁이 나. 저런 사람과 사랑에 빠질까 봐…." 대답하진 않았지만 나도 그랬던 것 같다. 가장 화려한 도시에서 본 가장 밑바닥의 절망은 불균질하지만 시적이었고 그래서 더 퇴폐적이고 아름다웠다.

작년 LA에서 중고 혼다 어코드를 타고 라스베가스까지 자동차로 질주해 달렸다. 고원지대가 많아 구름은 하늘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듯 낮게 떠 있었고, 금세라도 차를 집어삼킬 듯 바짝 다가와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지도를 펼치고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바라보았다. '데스벨리'라는 푯말이 적힌 곳에선 잠시 멈추어 서고 싶은 욕망을 참아가면서.

늘 화려한 조명이 빛나는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 영화‘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실패한 인생의 집결지라는 라스베이거스의 이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친구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OST를 틀었다. 스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다섯 시간 이상을 떠들며 한국인 출신의 카지노 딜러들이 많다는 것과 한 방을 노리다 알거지가 된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휴게실에 들러 '인 앤 아웃' 버거의 긴 줄을 기다린 끝에 집채만 한 버거와 한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점보사이즈 콜라를 살 수 있었다. 이 김 빠진 콜라를 라스베가스의 어느 골목에서 거지에게 주었다. 그는 내 콜라를 원했다. 자포자기한 파산자들이 이 도시의 '지하 하수구'에 숨어드는 다큐멘터리를 본 것은 채 1년도 되지 않았었다. 내게 라스베가스는 성공이 보장된 화려한 도시라기보단 실패한 인생의 집결지처럼 보였다. 아이러니라는 단어는 이 도시에선 어쩐지 진부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베가스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도시 전체는 '디즈니랜드' 같았고 거대한 서커스장 같았다. 거의 모든 호텔을 점령한 '태양의 서커스'단의 공연광고가 여기저기 나붙어 있었고 '셰어'나 '베트 미들러'의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는 곳도 많았다. 사람들은 카지노 주위를 돌며 저마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이 도시의 쾌활함이 불편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나 무언가를 바꾸려 하지 말아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내가 알코올 중독자인 것도, 당신이 매춘부인 것도."

길을 걷다가 나는 '벤'의 독백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대사에 '당신' 대신 이 도시의 이름을 넣는다 해도 그것의 파장이 크게 변하지 않는단 사실에 놀랐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도시엔 산타클로스가 커다란 보따리 안에 공연포스터를 넣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 멀리 '파리의 에펠탑'이 보이고, 뉴욕의 '자유여신상'이,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보였다. 카지노 어디선가는 누군가 잭팟을 터뜨리고, 하수구 어디선가는 쥐떼들과 함께 선잠을 청하는 누군가가 있을 터였다. 거룩하고 고요한 작년 라스베가스에서의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존 오브라이언의 반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고, 원작자는 영화 촬영 결정 후 2주 만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350만불의 저예산으로 4주 반 만의 짧은 기간 동안 촬영된 이 영화의 전편에 흐르는 스팅의 노래 〈Angel eyes〉, 〈My one and only love〉는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