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남동 51-3번지에 있는 2층 집에는 '하얀집 등심 삼겹살'이라는 빨간 간판이 너덜너덜 붙어 있다. 주택을 개조한 고깃집이었지만 얼마 전 폐업했다. 쓰레기가 뒹굴뒹굴 나돌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이곳에 며칠 전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디자이너, 사진가, 설치예술가 열 팀이 방마다 둥지를 틀었다. 며칠 전까지 노부부가 살았다는 바로 옆 51-1번지 2층 집에는 예술가 일곱 팀이 입주했다. 2층 창가 방을 꿰찬 설치미술가 로리 킴은 곧 있을 개인전에 쓸 소품을 만들고 있고, 건넌방에 들어간 사진가 한평화는 벽과 천장에 흰색 페인트를 칠하고 있다.

불가마에 까는 옥잠화 매트를 바닥에 둔 유대영의 작업실.

한남동에 있는 빈집 여섯 채에서 예술가들의 특별한 '동거'가 시작됐다. 지식경제부가 주최하고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주관하는 '디자인 코리아 2010'의 사전 행사 '디자인 코리아 2010 인 한남(in Hannam)' 프로젝트다. 서로 다른 빛깔의 예술가 30팀 78명이 빈집을 상상력 넘치는 작업실로 꾸미는 중이다.

폐쇄된 그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아무나 자유롭게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 디자이너가 작업하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다. 문을 열 때마다 살아 있는 예술을 실시간으로 체험하게 된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박태은씨는 "디자이너의 일상이 생중계되는 일종의 '리얼 버라이어티 타운'"이라고 말했다.

낡은 원룸을 빈티지풍으로 바꾼 포토그래퍼 박일호의 작업실. 벽지를 뜯어내 콘크리트를 노출시키고 삼겹살집의 거울을 가져다 놨다.

빈집은 한남동 문화벨트 개발 예정지의 집주인 몇몇이 두 달간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쓸 수 있도록 내놓은 집들이다. 고깃집 외에도 원룸형 다가구주택도 있고, 꽤 괜찮은 대저택도 있다.

31-4번지 주택에 입주한 그래픽 아티스트 유대영은 찜질방 불가마에 까는 옥잠화 매트를 방에 들여놨다. "집보다 여기가 훨씬 좋다"며 며칠째 이곳에 살고 있다. 옆옆방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술가 고상우의 방. 그는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라며 미국에서 날아왔다. 이 집에는 탤런트 구혜선도 들어올 예정이다. 그녀가 일러스트 작업을 할 방은 한창 단장을 하고 있다.

한남동 빈집에 둥지를 튼 젊은 아티스트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유대영(DIZI), 김한규, 로리 킴, 조원석, DUDE, 목영교, DAREZ, 이승은, 한평화, 박일호.

31-5번지 원룸형 다세대주택은 예술의 집합소 같다. 독립된 방을 열 때마다 색다른 예술과 조우한다. 곰팡냄새 진동하는 1층 106호를 하루 만에 빈티지풍 작업실로 훌륭하게 변신시킨 사진가 박일호는 "낡은 빈집 분위기가 작업 스타일에 딱 맞다"고 흐뭇해했다. 205호, 206호 입주작가인 디자이너 빈이 말했다. "강남과 강북을 잇는 문화 지역 한남동에서 여러 아티스트가 두 달 동안 함께 호흡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작가들의 동거 기간은 다음 달 말까지. 이후 집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디자이너들의 열정을 한껏 느끼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블로그 blog.naver.com/inhannam에 들어가면 빈집의 변신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