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신학
칼 슈미트 지음|김항 옮김|그린비|127쪽|1만2000원

흥미롭게도 국내외적으로 좌파진영에서 히틀러시대 '극우' 법사상가 칼 슈미트를 재조명하는 붐이 일고 있다. 국내에도 번역된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과 더불어 그의 결단주의 법이론이 압축적으로 요약된 이번 저서는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라는 단호한 주장에서 시작한다.

국내에서는 과거 유신헌법을 기초했던 법학자들이 자신들의 근거로 삼았다 하여 저주에 가까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슈미트가 좌파진영에서 최근 주목을 끄는 이유는 슈미트야말로 우파 사상가 중에서 가장 극한에 있는 현실주의 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말하는 예외상태란 긴급명령이나 계엄상태와 같은 특수상황을 말하지 않는다.

슈미트는 법치주의와 규범에 입각한 헌법론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든다. 현실은 늘 예외상태이며 심지어 정상상태인지 예외상태인지를 판단하는 결정권 또한 헌법이 아니라 주권자가 갖는다. 이 때문에 히틀러를 정당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지만 주장만 놓고 본다면 슈미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헌법이건 법률이건 그것을 헌법이게 해주고 법률이게 해주는 것은 헌법이나 법률이 아니라 헌법 외적인 것, 법률 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무수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좌우 할 것 없이 기존의 법질서가 흔들린다고 판단하면 슈미트를 다시 읽게 되는 것 아닐까? 주권론에 관한 기존의 이론들을 검토하면서 슈미트가 제시하는 대안은 철저하게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겨냥하고 있다. 그가 책에서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를 가차없이 비판하는 것도 실은 법치주의 자체보다는 이런 법치주의가 무정부주의로 가는 교량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슈미트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는 국가수호였다. 실제로 그가 살았던 1·2차대전 사이의 독일은 비정상의 극치였다. 그가 극한적인 상황에서 국가수호를 위한 정치이론적 투쟁지침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이 팸플릿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