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꼭 100년 전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됐고,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35년간 갖은 고통을 겪었다. 그 같은 식민지 지배가 안긴 상처는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조선시대의 도시 공간 해체다. 우리 의사와는 상관 없이 식민지 지배국의 논리로 진행된 이런 변화가 우리 도시를 왜곡하고 우리 삶을 비틀어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실조차 잊혀지고 있다.

◆전국 주요 읍성마다 성벽 갖춰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330곳 정도의 군(郡)·현(縣)이 있었다. 군·현은 부, 목, 군, 현 등 6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이런 행정 단위마다 청사 소재지에 동헌과 객사 같은 관아가 설치됐다. 한반도 전체에 고을 수만큼 동헌이 있었고, 객사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각급 관아 외에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 여단(�j壇), 성황사(城隍祠) 같은 공식 제사시설이 군·현의 중심 고을, 즉 읍성(邑城) 외곽에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 전국의 읍성은 이렇게 시설과 공간구조가 획일적이었다.

지난 4월 울산읍성 둘레길 첫 탐방에 나선 시민들이 중구 옛 도심 골목길 바닥에 ‘읍성지’라는 길 안내문을 새겨 넣은 뒤 기념 촬영했다.

그 같은 읍성구조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시작은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반도 삼남(三南)의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해지자 이에 맞서 축조된 것이 읍성이다. 이후 조선 초기 세종, 문종 대를 거쳐 성종 때까지 수많은 읍성이 축조됐다. 조선 말기의 문헌을 보면 전국 104곳에 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군·현 중심 고을의 1/3가량이 성벽을 갖췄던 셈이다. 주로 해안이나 국경지방과 외국 사신이 통과하는 고을을 중심으로 읍성이 만들어진 때문이다.

◆울산에도 조선 중기에 읍성 축성

울산은 고려때 처음 '울주'라는 이름을 얻었다가 조선 초기에 '울산군'이 되고, 임진왜란 이후부터 '울산도호부'로 명칭이 굳어졌다. 울산군의 중심 고을은 처음에 중구 반구동과 학성동 일대에 있다가 세종 때 잠시 지금의 병영성으로 옮겨졌다. 이후 1436년에 와서 현재의 중구 북정동에 동헌과 객사가 처음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해로부터 41년이 지난 1477년에 이 자리에 울산읍성 축성이 완성됐고, 그 범위는 현재의 중구 북정동, 교동, 성남동, 옥교동에 걸쳐 있었다.

울산읍성은 축성 후 불과 120년이 지난 1597년에 왜군에 의해 모두 파괴되고 말았으니 그 운명이 순탄하지 못했다. 정유재란 당시 울산지역에 본거지를 둔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그 휘하 장수들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과 큰 전투를 준비하면서 울산읍성을 허물어 그 석재를 가지고 도산성(지금의 학성공원)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후 전쟁은 오래지 않아 끝났지만 울산읍성은 두 번 다시 그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성벽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울산읍성의 성벽 형태는 이미 400여년 전에 허물어지고 없지만, 읍성을 둘러쌌던 그 성벽의 위치는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확보하고 있는 울산 최초의 지적도〈그래픽1〉가 그 자취를 보여준다. 이 지적도는 1912년에 작성된 것인데 여기에 노란색(지면상에는 회색) 부분은 모두 국유지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지적도 중심부의 노란색 큰 필지는 객사와 동헌 자리다. 이 객사와 동헌을 중심으로 원모양으로 빙 둘러싸듯 가장자리에 띠를 이루고 있는 노란색 국유지 부분이 있는데, 이 둥근 띠가 울산읍성을 둘러쌌던 성벽터다. 당시 성벽은 가장 중요한 군사시설, 즉 국유지였고 비록 그 외관은 파괴된 채 40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자취가 그대로 남아 전해진 것이다.

◆읍성터에 명맥 이어온 둘레길

이렇게 성벽터를 찾아내고 그 현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도 함께 발견됐다. 읍성 성벽터를 따라가며 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는 사이사이로 조그만 골목길들이 끊어지지 않고 면면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실핏줄이 우리 몸의 외곽 말단을 한 바퀴 빙 돌아 흐르는 듯하다. 바로 '울산읍성 둘레길'〈그래픽2〉이다.

구불구불 주택가를 돌아나가며 읍성터를 따라 이어진 이 골목길은 지금부터 533년 전 울산읍성이 처음 축조되면서 생겨났다. 이후 정유재란의 시련 속에서 웅장했던 울산읍성의 성벽이 왜군에 의해 파괴됐고 100년 전에는 식민지로 전락해 옛 읍성의 관아들마저 헐렸나갔지만, 이 골목길은 옛 울산 고을의 중심 마을을 감쌌던 읍성의 성벽 흔적과 함께 끈질기게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둘레길에서 이 고을 내일 살필 것

우리는 이번 기획 시리즈를 통해 옛 울산읍성의 흔적과 읍성을 감싸고 이어진 둘레길을 차근차근 돌아볼 것이다. 이 길에서는 흔적만 남아 전하는 울산읍성의 아픈 과거를 반성해 보는 것과 함께 앞으로 '울산'이라는 광역도시가 이 둘레길을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해보려 한다.

우리는 앞서 지난 4월 10일 그 첫걸음을 뗐다. 그때까지 학자의 연구실에서만 되살아나 꿈틀대던 울산읍성 둘레길을 문밖으로 끄집어내 시민들과 함께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우리는 둘레길 바닥에 '읍성지'이라는 글을 새겨 넣었고, 곳곳에 '남문지' 같은 의미있는 지명도 되찾아 남겼다. 울산시민연대 도시학교 회원들과 중구청 관계 공무원이 함께 길을 나섰고, 향토를 사랑하는 시민 몇몇분도 기꺼이 길동무가 돼주었다. 길을 걷으며 새삼 확인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격려는 더할 나위 없는 큰 힘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