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첫 구절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비잔티움의 역사에 대해 물어준 타마라와 포셔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 두 사람은 역사학자도, 저자의 가족도 아니다. 저자가 재직하는 학교의 건설 인부들이다. 이들은 저자의 연구실 앞을 지나다 '비잔티움 역사 교수 연구실'이란 이름이 궁금해 문을 두드리고 "비잔티움 역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저자는 이들에게 10분 정도 비잔티움 역사를 설명했고, 인부들은 "비잔티움 역사가 그렇게 흥미로울 줄 몰랐다"며 자신들을 위한 책을 써달라고 했다.

이 책의 문제의식과 눈높이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저자는 '그리스 정교회' '라벤나 모자이크' '로마법' '그리스의 불' '비잔티움의 환관' '안나 콤베나' 등으로 나눠 비잔티움의 1100여년 역사를 지루하지 않게 설명하고 있다.

글항아리 제공

사실 서구 사학계에서 비잔티움, 즉 동로마제국은 무시당해 왔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비롯해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도 비잔티움을 그리스·로마에 '수동적'으로 연결된 나라로 봤다. 심지어 19세기 아일랜드의 역사가 일리엄 레키는 "비잔티움 제국사는 사제, 환관, 여자, 독살, 음모, 배은망덕함으로 점철된 단조로운 이야기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말했다. 어쩌면 이런 서구의 부정적 인식 때문에 우리도 비잔티움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1000년을 넘게 이어온 비잔티움의 거대한 실체가 생생하게 나타난다.

저자에 따르면 비잔티움의 정체성은 법률과 군사제도, 언어에 잘 나타난다. 로마제국의 법치주의와 군대편제는 이어받았고, 언어는 지역적으로 가까운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서기 330년, 너무나 비대해진 로마제국을 지배하게 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천도(遷都)라는 결단을 내렸다. 대상지는 기원전 7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이 만든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해안에 있는 식민도시 비잔티온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알렉산더가 세운 알렉산드리아처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새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했다.

그 이후의 역사는 화려하다. 서로마의 영토가 게르만족에게 점령당해 느린 속도로 문명화되는 동안 동로마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오롯이 보존하고 발전시켰다. 수도교(水道橋), 목욕탕, 원형경기장 같은 외형상의 로마 문명을 그대로 옮겨온 것은 물론이다. 정신적인 계승은 더욱 의미가 깊다. 우리가 아는 '로마법' 역시 테오도시우스 2세 때 처음으로 '테오도시우스 법전'으로 편찬됐다. 이 법전은 100년쯤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법 대전'으로 다시 정리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이슬람 학자들을 통해 기독교 세계에 전파됐지만 플라톤 철학을 서구에 전해준 것은 동로마의 학자들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비잔티움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이 하나라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확립한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 6세기에 세워진 성 소피아 성당과 같은 규모의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까지 서로마 지역은 1000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 위대한 건축물에 감명받은 이슬람 세력은 그 이전까지 천장이 없이 노출된 공간으로 만들었던 사원에 돔 천장을 씌우기 시작했다.

동로마제국의 강성한 국력은 경제력으로 증명됐다. 동로마의 금화는 시칠리아섬의 서부와 이탈리아 남부, 북아프리카에서까지 발굴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슬람 세력의 공세로부터 서구 문명을 보호해준 '방파제'로서 동로마의 역할은 지대하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뒤 로마로 피신한 동로마 난민들의 보따리에서 나온 그리스 고전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꽃피운 풍요로운 거름이었다. 이렇게 그리스·로마 문명과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잘 보존해 서구에 전해준 동로마제국의 운명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