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황장엽(87)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남한 생활을 버텨준 힘은 '철학'이었다. 그리고 그 철학을 배우러 온 제자들이었다. 그는 지난 10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일주일에 7시간씩 철학 강의를 했다. 서울 논현동의 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실에서 한 번에 30~40명이 모여 강의를 들었다. '제자'들은 두 그룹이었다. 탈북자들이 있었고, 황 전 비서의 철학에 공감하는 학자와 전문가들이 있었다.

황 전 비서는 북한 김일성종합대 철학강좌장(학과장) 출신이다.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이자 김정일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친 일도 있었다. 그런 그가 한국에 와서 '인간 중심 철학'을 강의하기 시작했을 때 일부 탈북자들과 보수 인사들은 불만을 표시했다. 왜 북한에서 가르치던 '주체철학'을 남한에까지 전파하느냐고 했다.

북한에서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주체사상의 기본 이념을 외운다. 강제로 주체철학을 암송했던 일반 탈북자들에게 황 전 비서의 '인간 중심 철학' 강의는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강연을 꾸준히 들어보면 과거 북한에서 배운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내용이라는 걸 알게 된다. 원래 인간이 중심이었던 주체사상을 김정일 부자가 '수령' 중심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처음에 황 전 비서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그의 강연을 듣고 나면 김일성 부자(父子)가 그의 철학을 도용해 악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황 전 비서의 분노는 자신의 전부였던 인간 중심 철학이 독재의 '도구'로 사용됐다는 데 있었던 것이다.

황 전 비서의 강의를 들을 때면 깜짝 놀라곤 했다. 그는 80대 후반의 나이에 몸도 몹시 여위어 어떨 때는 서 있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러나 논리 정연하게 1시간 이상 강의하는 모습을 보면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힘이 넘쳤다. 인생의 모든 기쁨이 거기서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한번은 우주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복잡한 물리와 수학적 개념들을 이야기했는데 공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감탄했다. 그는 가끔 강의 중에 북한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한번은 김정일이 술 마시는 자리에 가게 됐다고 한다. 김정일은 술을 전혀 못 마시는 황 전 비서에게 술을 마시라고 강요했다. 할 수 없이 받아 마셔 보니 맹물이었다고 했다. 김정일은 때로 자신은 맹물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억지로 술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 황 전 비서는 "김정일은 원래 속이 좁고 비겁하다"고 했다.

황 전 비서의 철학 강의는 지적 능력과 수업 참여도에 따라 레벨을 정해놓고 화·수·목 토요일에 오전·오후반으로 나눠서 진행됐다.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오면 거기에 맞춰 강연했다. 자신의 강연을 열심히 듣는 사람은 누구든 존중하고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다. 특히 계간 '시대정신' 팀과의 만남은 황 전 비서의 가장 큰 낙(樂)이었다. 과거 주사파의 대부였던 김영환·한기홍씨 등 시대정신 팀은 제자를 넘어서 동지적 관계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는 북한에서 배웠던 주체사상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자신의 철학을 잘 배우려 하지 않는 탈북자들을 제자로 키우는 데 상당한 정열을 쏟아부었다. 북한민주화위원회의 지도 이념을 '인간 중심 철학'으로 하고, 자신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향후 북한을 재건하는 세력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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