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 앉아 있는데 맞은편에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 '묻지 마' 살인 사건 피의자로 11일 경찰에 붙잡힌 윤모(33)씨는 "불행한 내 처지와 너무 비교돼 순간적으로 분노해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윤씨는 지난달 7일 오후 6시쯤 서울 양천구 신정동 한 다세대 주택 옥탑방에서 자녀와 함께 TV를 보던 장모(42)씨 머리를 둔기로 내리친 뒤 비명을 듣고 방에서 나온 남편 임모(42)씨 옆구리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공개수배됐다. 공사장 일용직 일을 하던 윤씨는 당일 일거리가 없자 오전 6시부터 망치 등 도구들이 든 배낭을 메고 배회하다 저녁에 놀이터에서 막걸리 한 병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그 뒤 맞은편 집에서 들려오는 가족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격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서울 양천경찰서는 범행 36일 만인 11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서 탐문수사를 하던 중 범행 당시 부근 CC(폐쇄회로)TV에 찍힌 용의자의 복장과 같은 검은색 상의와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던 윤씨를 붙잡아 범행을 자백받았다고 12일 밝혔다. 경찰은 윤씨가 살고 있던 서울 양천구 신월동 법무부 산하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생활관에서 범행에 사용된 흉기를 증거물로 압수했다.
윤씨는 경찰 조사에서 "평소 TV나 신문을 보지 않아 (임씨가 숨진 사실을) 몰랐다"며 "유족에게 너무 죄송하고 위안이 된다면 목숨이라도 버리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윤씨에 대해 살인과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가정에 열등감 느낀 화풀이 범죄'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윤씨를 '지극히 비(非)사회적인 인물'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윤씨가 10대 후반에 범죄를 저지르고 20대의 시간을 모두 교도소에서 보냈기 때문에 사회성이 완전히 결여됐다"고 했다. 이 교수는 "TV나 신문을 전혀 몰랐다는 윤씨의 진술에서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윤씨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피해자들이 자신은 갖지 못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사실에 격분해 화풀이한 것"이라며 "열등감의 대상이 '돈'이 아닌 '가정'이었기 때문에 소득 수준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윤씨는 피해자 집에서 범행을 저지른 뒤 금품은 훔치지 않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법무부 시설에서 지내며 범행
윤씨는 범행 후 한달여가 지날 때까지 범행 현장에서 6㎞쯤 떨어진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생활관에서 태연히 지내온 것으로 드러났다. 강도강간 등 혐의로 14년 6개월을 복역한 윤씨는 지난 5월 순천교도소에서 출소하고 이곳에서 지내왔다.
윤씨와 같은 방을 썼던 심모(37)씨는 "윤씨는 조용한 사람이었다"며 "신정동 사건 공개수배나 CCTV에 찍힌 화면을 뉴스에서 봤지만, 그가 그랬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윤씨가 새벽 일찍 생활관에서 나와 밤늦게까지 공사장에서 일해 그를 아는 동료도 얼마 되지 않았다.
출소자들의 사회 적응을 돕는 이 공단은 출소자들에게 2인 1실의 생활실을 제공하고 직업훈련도 무료로 받게 해준다. 이 생활관에 들어가기 원하는 출소자들은 심사를 거쳐 6개월씩 거주하고, 직업 있는 이가 연장신청을 하면 최장 2년간 머무를 수 있다. 이곳엔 대부분 일용직으로 일하거나 대리운전을 하는 출소자 5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경찰은 이곳 생활자 명단을 조사했지만, 윤씨의 사진이 실제와 달라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공단측의 생활자 관리도 전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공단측은 "당황스럽다"면서 "우리는 출소자들의 갱생을 돕는 기관이지 감시하는 기관이 아니고 직원도 8명뿐인데 어떻게 (윤씨의 범행 사실을) 알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