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등학교 시험에 나온 문제다. '우리나라를 빛낼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열심히 공부한다 ②용돈을 많이 쓴다 ③만화책을 읽는다 ④열심히 논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답은 당연히 하나다. 초등학교부터 중·고교 졸업 때까지 12년 사지선다(四支選多)형 문제와 모범 답안에 우리는 길들여져 있다. 용돈을 많이 써보거나 만화책을 읽고, 열심히 놀아본 경험을 밑거름 해서도 나라를 빛낼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힘들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씨는 1967년 처음 이화여대 교수가 돼 입시 감독을 맡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김소월 시 '진달래꽃'의 주제를 묻는 문제가 사지선다형으로 나왔다. 시론(詩論)을 가르치는 자신이 보기엔 '이별' '사랑' 등 넷 모두에 ○표를 할 수도 있고 ×표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의심 없이 그 중 하나만 골라 ○표를 하고, 바깥에선 누구도 문제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후 이씨는 매년 첫 수업을 '진달래꽃'의 다양한 주제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사지선다형 시험은 해방 후 미국의 실증주의 교육철학 도입과 함께 우리나라에 자리 잡았다. 주관식 논술형 시험은 평가자에 따라 점수가 들쭉날쭉하고 정실(情實)에 흐를 위험성이 있다. 사지선다형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준에 따라 공정하고 공개적인 경쟁을 보장할 수 있다고 해서 환영받았다. 무엇보다 채점이 쉽다. 국가 차원에선 1969년 대입 예비고사에서 채택됐고 행정고시 등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도 쓰였다.
▶시험에 절어서 살다 보니 '사지선다형(型) 인간'도 나왔다. 자기가 생각하는 정답을 대지 못하고 넷 중 하나를 고르는 게 몸에 배었다. 정답이 안 떠오를 땐 연필을 굴리는 것도 흉이 되지 않는다. 네 개의 예시된 답안 바깥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의 틀을 닫아버린다. 인생엔 정답이 너무 많은 경우도 있고 정답이 안 보이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미국 교육부가 3900억원을 들여 사지선다형 시험을 전면 폐기하는 '학력평가 개혁'에 착수했다는 소식이다. "무엇을 배웠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평가하자는 취지"라는 설명이다. 평가의 편의에 미련 갖지 말고 수험생의 진짜 능력을 테스트할 방식을 우리도 찾아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