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권력서열 3위이자 '서민 총리'로 널리 알려진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정치체제 개혁을 주장하다 사면초가에 몰렸다.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등 무려 3대(代)에 걸친 최고 권력자들의 (부)비서실장을 지내며 끈질긴 정치생명을 과시했던 그가 최근 정치개혁 논란에 휩싸여 보수파는 물론 개혁적인 리버럴 세력으로부터도 공격을 받고 있다.
원 총리는 지난달 20일 '선전 경제특구 지정' 30주년을 맞아 선전을 시찰하면서 정치체제 개혁을 역설했다. "개혁개방을 견지해야만 국가의 앞날이 있다. 경제체제 개혁뿐 아니라 정치체제 개혁도 추진해야 한다. 정치체제 개혁이 없으면 그동안 쌓은 경제개혁의 성과도 잃어버릴 것이다."
원 총리의 정치개혁 발언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는 총리에 취임한 지 4년째이던 2007년 "인민에게 더 존엄한 삶을 부여해야 한다"는 '인민존엄론'을 제기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어 자신의 또 다른 개혁 이념인 '(인민의) 보편적 가치 존중'이라는 서구식 주장을 내세우면서 정치적 파장을 예고해왔다. 2007년 전세계에 방영되는 CNN과의 인터뷰에서도 "발전은 전면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경제개혁뿐 아니라 정치개혁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런 정치 성향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선 세력은 대체로 3부류라고 홍콩 잡지 아주주간(亞洲週刊) 최신호는 분석했다.
정치개혁이든 경제개혁이든 일체의 개혁을 거부하고 마오쩌둥(毛澤東) 시절로 회귀하려는 극좌파들은 원 총리를 미국에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매국노로 규탄한다. 이들은 톈안먼(天安門) 사태 때 개혁파 자오쯔양(민주화운동 동조 혐의로 숙청당함) 총서기를 수행하던 원 총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를 '제2의 자오쯔양'으로 규정한다. 또 다른 비판 세력은 기득권 이익집단. 이들은 현상유지를 추구하며 원 총리가 주장하는 추가 개혁을 완강히 거부한다.
리버럴 개혁파들도 원 총리를 비판한다. 보수파 못지않다. 원 총리보다 더 급진적인 이들은 총리가 정치개혁을 내세우고 있지만 진정한 개혁 의지와 능력이 없는 '쇼'를 하고 있다고 불신한다. 이들의 입장은 지난달 홍콩에서 발간된 '중국 잉디 원자바오'라는 책에 상당 부분 반영돼 있다. '잉디(影帝)'는 영화계의 제왕이라는 뜻으로, 거짓 연기를 잘한다는 뜻.
좌·우파 협공에 맞서 원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체제 내의 점진적이고 온건한 정치개혁을 지지하는 이들은 원 총리가 그나마 최고지도부 내에서 가장 강력한 개혁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그런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인민일보 부총편집을 지낸 저우루이진(周瑞金) 사회과학원 교수는 "원 총리의 개혁 주장은 현재의 성공에 도취된 사람들에게 중국의 개혁개방이 정체하거나 후퇴할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리는 경고"라고 말했다. 1992년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지도부의 보수화를 질타하며 개혁개방에 다시 불을 댕긴 '남순강화(南巡講話)'에 빗대는 해석이다. 원 총리의 우군으로 젊은 네티즌들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막강한 보수 정치세력의 파워에 견줄 정도는 아니다.
전문가들은 원 총리가 혹독한 비판에 시달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없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이 때문에 재임 중인 총리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부패 루머가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아주주간의 추번리(邱本立) 편집장은 "원 총리의 정치개혁 발언을 언론들은 보도조차 하지 않는다"며 "중국의 낭만과 이상이 죽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