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액션배우 이소룡(李小龍)의 대표작 중 하나가 1973년 작 '엔터 더 드래곤(Enter the dragon·용쟁호투·龍爭虎鬪)'이다. 5년 뒤 척 봐도 아류임을 알 수 있는 영화가 나왔다. '엔터 쓰리 드래곤(Enter three dragon)'이다. 이 영화 속 악당들은 두들겨 맞는 게 일이다. 5명의 '가짜' 이소룡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한국인 장일도(61)다. 1970~80년대 그는 '설중매' '송화강의 비객' '속(續) 소림 36방' 같은 무협영화 40편에 등장했다.
■무도인, 배우가 되다
장씨는 당수(唐手)의 달인이다. 충남 천안에서 17살 때 당수를 배운 뒤 경기도 송탄의 부대에서 무술교관으로 일했다. 군에서 제대한 1973년에 주한 미8군 영내에 첫 도장을 차렸는데 서양인들은 그를 '한국의 이소룡'처럼 여겼다.
공무원 봉급이 몇 만원이던 시절, 월 6000원씩 내는 관원이 70~80명이나 됐다. 장일도의 인생은 영화 오디션을 보면서 바뀌게 됐다. 짙은 송충이 눈썹과 빼어난 무술실력에 반한 영화감독은 그를 주연으로 뽑아버렸다.
처음 해보는 연기였지만 개런티가 20만원이나 됐다. 1976년 개봉한 '일지매'에 10만명이 몰렸다. "무협영화의 인기가 워낙 좋을 때였어요. 웬만하면 5만~6만명은 들었지요." '일지매' 덕에 그는 한·홍콩 합작영화에 캐스팅됐다.
'3인 호객'이었다. 그는 영국 런던에서 사범을 맡을 수도 있었지만 포기했다. 편당 400만~500만원의 고액 개런티, 그를 향해 달려드는 미모의 홍콩 모델, 연기를 더 잘해보고 싶다는 오기가 버무려진 결과였다.
장씨는 1979년부터 대만에서 무협영화에 올인했다. 그런데 80년대 중반 '영웅본색'이 나오며 모든 게 달라졌다. 홍콩 누아르라 불리는 '총질 액션 영화'에 매료된 팬들은 무협영화를 '뒷방 노인'처럼 취급했다.
■홍콩은 나를 통한다
장씨는 1989년 배우생활을 끝내고 기획사를 차렸다. 음료수 CF에서 "사랑해요"를 외치던 주윤발, 초콜릿 들고 노래 부르던 고(故) 장국영, 흰색 음료수를 들고 "반했어요"라고 속삭이던 왕조현이 모두 장씨를 통해 캐스팅됐다.
출연료는 주윤발이 1억원, 장국영이 8000만원, 왕조현은 600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에이전트 장씨에게 떨어지는 돈은 출연료의 약 10%였다. 짭짤한 수입을 올린 장씨는 내친김에 기획사를 영화사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황비홍 1편' '동사서독' '성원' '메이드인 홍콩'처럼 2000년 이전까지 한국에 상영된 홍콩영화의 70%가 그의 손을 거쳤다. 최민식과 장백지가 주연한 영화 '파이란'엔 2억원을 직접 투자하기도 했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홍콩영화가 몰락하면서 그의 사업도 무너졌다. "한 편을 수입해 개봉하는 데 5~6억원이 들어요. 4~5편이 연달아 흥행에 참패했으니 얼마겠어요." 영화사는 2002년에 부도 처리됐고 그는 15억원의 빚을 떠안았다.
■"무도인의 배짱으로"
그러나 무인(武人)은 다시 회생했다. 경기도 일산 자유로 부근에 차린 자동차 극장이 대박을 친 것이다. 주말 저녁이면 자동차가 몰려와 교통정체를 빚을 정도였다. 장씨는 "충무로에서 진 빚을 일산에서 갚았다"고 했다.
"쉽게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도인의 배짱이 있었거든요." 영화판을 전전했지만 하루 1~2시간씩은 꼭 당수를 수련했던 그였다. 그가 6월 당수도 세계연맹 인가를 받고 서울 장충동에 사무실과 체육관을 열었다.
2005년에 이미 당수도와 영어를 함께 가르치는 280평 규모의 학원을 차려보기도 했던 그는 "미미해진 한국 당수도의 명맥을 제대로 잇고 일반인들에게 당수도의 무도인 정신뿐 아니라 영화 무술까지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목표는 당수도 영화를 만들어 한국의 무술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이소룡, 황비홍이 뜨면서 중국 무술과 문화가 세계로 퍼졌지요. 한국도 그럴 수 있습니다. 무도인과 영화인으로서의 마지막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