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탈리아에 가서 신기한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파스타 모양의 다양성에 입이 쩍 벌어졌다. 꽈배기, 나사 모양에 사람의 치부를 닮은 것까지 대략 수백 종의 파스타가 시장에 쌓여 있었다.
반죽은 같은데 단지 면의 모양만 달라진다고 파스타 맛이 뭐 달라지겠어,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일하던 한 식당은 파스타 종류가 열 가지가 넘었다. 주문이 들어오면 각기 다른 면을 솥에 삶아야 했다. 이게 꽤 중요한 일이어서 중간급 요리사가 관리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도망간 애인을 찾으러 결근하자 내게 차례가 왔다. '로베르토(우스운 내 이탈리아 이름이었다)! 콘트롤라 파스타(파스타를 담당하게)!' 주방장의 이 한마디로 졸지에 파스타 솥 담당이 됐다. 손님이 쏟아져 들어온 날, 나는 거의 곤죽이 됐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각기 다른 면을 다른 타이밍에 삶는 일은 정말 최악이었다. 옷 속에 파스타 가락이 몇 개 들어와 있었고―녀석들에게 날개가 있다는 건 그때 알았다―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옷이 마치 전신 수영복처럼 달라붙었다.
물론 손님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대개 '이 따위로 삶은 파스타를 먹으란 말이야'였지만, 간혹 '엉뚱한 파스타가 왔다'는 것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게 그거 같은 파스타인데 미세한 모양의 차이로 다른 이름이 붙어 있을 줄이야. 불과 두께 0.5mm 차이로 스파게티와 스파게티니가 달라졌다. 마치 시험을 만든 이를 원망하는 학생처럼, 나는 '그게 그거'인 파스타에 다른 이름을 붙인 디자이너(이탈리아엔 파스타 디자이너가 있다)를 저주했다. 왜 파스타를 그렇게 다양하게 만든 걸까. 별 볼일 없는 나 같은 이탈리아 요리사를 골탕먹이려고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한 탤런트는 수제비만 보면 신물이 난다는 이야기로 많은 이들을 울렸다. 수제비는 곧 가난의 상징인 때가 있었다. 그런 그이도 칼국수는 잘 먹었을지 모른다. 똑같은 반죽인데 말이다. 나는 반대로 칼국수라면 이를 박박 간다. 역시 어려운 시절, 우리의 주식이었으니까. 한 번은 동네에서 놀고 있는 누이에게 '누나, 저녁밥 먹어' 해야 할 것을 '칼국수 먹어'라고 했다가 엄마에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 물론 나는 지금도 칼국수를 먹지 않는다.
똑같은 반죽인데 수제비와 칼국수의 기호가 왜 그리 달라질까. 바로 인간의 혀가 가진 원초적 숙명이 아닐까. 맛이란 꼭 화학적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국수의 두께 같은 물리적 차이로도 맛이 다르다고 느낀다. 만약 소면으로 자장면을 만들거나, 두툼한 우동면으로 비빔국수를 만들면 다들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다에 나는 한 표!
내가 아는 어떤 호사가는 단순히 혀만 물리적 맛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목구멍도 한몫한다고 주장한다. '목이 미어지게' 국수를 입에 넣어야 진정한 맛이 있다는 말이다. 아,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고 통쾌하다.
사족이지만, 근 십여년 동안 소면의 두께가 점점 가늘어지고 있는 듯하다. 가는 면일수록 입안에 감기는 맛이 좋고, 더 새침하게 여겨진다. 반면, 꿈틀거리는 박력의 씹힘은 없다. 점점 더 말랑말랑하고 섬세하며 연한 것을 좋아하는 현대인의 이런 기호 변화는 국수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