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남구청 내 야구장. 쪼르르 달려온 아이에게 감독이 물었다. "네가 친 공이 어느 쪽으로 갔지?" "왼쪽으로요. 앗, 말하면 안 되는데…"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칠 때 타구 방향 보지 말라고 했지"하며 꿀밤을 때렸다.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중요해요. 타구 보려고 하면 어깨가 빨리 열려 좋은 타격이 안 나오거든요." 그의 이름은 강혁(36). 아마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두산과 SK에서 뛴 그를 야구팬들은 '비운(悲運)의 야구 천재'라고 부른다.

그는 신일고 시절 장효조를 이을 최고의 교(巧)타자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스카우트 파동과 연이은 부상으로 프로 7시즌 동안 428경기에서 타율 0.249, 18홈런, 115타점에 그친 뒤 2007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비운의 야구천재’로 불렸던 강혁이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새 인생을 살고 있다. 그가 인천 남구청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모습. 강혁 감독은“내 인생이 바닥까지 쳤으니 이제 천천히 한 걸음씩 올라가겠다”고 말했다.

#현재―"지도자는 내 천직"

강혁은 인천 남구청 리틀야구단을 맡고 있다. 올 1월 창단 후 7개월 만에 선수반까지 만들어 8월 중순 공식 대회에 나선다.

"제 이름 걸고 가르치는 건데, 창피는 안 당해야죠. 이 아이들이 진짜 선수됐을 때 '강혁 밑에서 제대로 배웠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강혁은 현역인 손민한(롯데) 진갑용(삼성) 이병규(LG) 이대진(KIA)과 같은 또래다.

#불운 1―영구제명

그의 불운은 신일고 3학년 때이던 1992년 시작됐다. 한양대와 프로구단 OB와 이중 계약을 했고, 한양대 진학을 선택하면서 KBO에서 영구제명을 당했다.

프로에서 외면당한 그에게 길을 열어준 것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이었다. 박찬호 등과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따내면서 여론이 바뀌자 KBO가 이듬해 프로의 문을 열어줬다. 2000년 두산에 입단했지만 생각만큼 방망이가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 음주운전 사고까지 터졌다.

#불운 2―부상과 병역비리

강혁은 2000시즌 후 강병철 감독이 이끄는 SK로 이적했다. 그는 "2001시즌 개막전에서 3점 홈런을 쳤고, 시즌 초 한 달간 6홈런 30타점으로 강 감독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느닷없는 왼쪽 어깨 통증이 상승세를 꺾었다. '어깨 근육이 찢어져 수술과 재활에 4~6개월이 필요하다'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그는 "다음 시즌엔…"하는 생각에 수술을 했다. 어깨 통증이 말끔히 사라진 2003년. 그는 시범경기에서 펄펄 날았고, 매스컴은 '강혁이 돌아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막상 개막이 되자 주전 자리를 꿰찬 것은 고참 김기태였다.

"제가 기태 형보다 젊고, 발도 빠르고, 송구와 수비도 좋잖아요? 방망이는 비슷하고. 그런데 조범현 감독이 기회를 안 주는 거예요"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구하기도 했던 강혁은 "끝까지 해보자"란 생각에 다시 방망이를 잡았다.

2003년 대타 대수비로 주로 나선 강혁의 성적은 0.294, 4홈런 23타점, 김기태는 0.292, 3홈런 18타점이었다. 강혁은 2003시즌 후 스스로 "혁아, 너 정말 잘했다. 내년에 도약 한번 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즌 후 구단 워크숍에서 농구시합을 하다 왼쪽 발등 인대가 끊어졌다. 강혁은 부상과 재활로 2004년을 소득 없이 보내야 했고, 운동선수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돼 2005·2006년을 공익근무요원으로 보내야 했다.

2007년 돌아온 그를 김성근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훈련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김 감독 밑에서 몸이 배겨나지 못했다. 무리해서 연습하다 발뒤꿈치 통증으로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 2군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시즌 도중 삼성과 롯데에서 러브콜이 있었지만, 구단에서 풀어주지 않았다. 두 팀은 시즌 후엔 세대교체를 이유로 강혁을 외면했다. 2007년 시즌 후 그는 옷을 벗었다.

#불운 3―은퇴와 이혼

"선수 시절 땐 몰랐는데 막상 밖으로 나오니 100만원 벌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았다"고 했다. SK 유소년팀을 맡았지만, 아내와 두 딸을 먹여 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아내와 불화가 깊어지며 2008년 갈라섰다.

모든 것을 정리하자 수중에 남은 것은 1000만원. 월세 방 하나 잡고 나니 주머니에 남아 있는 게 없었다.

SK 유소년야구팀을 맡을 때엔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제주도에 좋은 자리가 있다는 얘기에 서둘러 그만뒀다가 공중에 뜬 처지가 됐다. 그러던 그의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게 바로 리틀야구단이었다.

#불운 끝, 희망 시작!

지난해 말 자신이 공익근무를 했던 인천 남구청에 전화했더니 "마침 잘 됐다"며 선뜻 야구단 창단 의사를 받아들였다. 지난 1월. 그의 앞에 코흘리개 어린이 50여명이 몰려들었다.

'프로야구 스타 출신이 아이들이나 가르치냐'는 소리가 싫을 법도 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내 인생이 바닥까지 쳤으니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죠."

그는 7~10년 정도 리틀야구단에서 꿈나무를 양성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해까지 그렇게 안 풀리던 일이 유소년 팀을 맡으면서 잘 풀리는 것 같다"며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이 내 인생에 있어선 최대의 보배"라고 했다.